기자가 쓴 양도공 종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09-02-11 조회수 : 3958
 
 
 

기자(記者)가 쓴 양도공(襄度公) 종가(宗家)

전주이씨 양도공파 이성계의 형님 집안

                              

월간(月刊) 『인물계(人物界)』 문화부장(文化部長) 김일주(金日柱)


  양도공(襄度公) 이천우(李天祐)는 조선의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형(兄)인 원계(元桂)의 둘째 아들로서 고려 말에 태조를 도와 왜구(倭寇)를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장군(將軍)이다. 태조가 운봉(雲峰)에서 왜장(倭將)을 격파할 때 백병전(白兵戰)을 벌여 귀와 코에 부상(負傷)을 입었다는 전기(傳記)가 남아 있다.

  태조가 중론(衆論)에 따라 왕위(王位)에 추대되었으나 세 차례나 불가(不可)하다고 사양할 때 양도공이 직접 태조의 침실(寢室)로 들어가 몸을 부축하고 나와 즉위(卽位)하게 한 공(功)도 있었다. 이로써 양도공은 태조(太祖) 때는 개국공신(開國功臣)이었고, 정종(定宗) 때는 정난정사공신(靖難定社功臣), 태종(太宗) 때는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3명의 왕(王)을 섬기면서 병조판서(兵曹判書)․이조판서(吏曹判書)․의금부도제조(義禁府都提調)에 올랐다.

  태종(太宗) 16년 양도공(襄度公)이 벼슬이 이미 최고위직(最高位職)에 이르렀으니 이만 물러가겠다고 아뢰자, 임금은 그를 친히 침실(寢室)로 불러 “경(卿)이 큰 공을 세웠는데 아직 보답(報答)을 하지 못했으니, 좋은 논 80결(結)과 노비 80명을 내리겠소.” 하였다.

  양도공은 “지금까지 입은 성은(聖恩)만도 과분(過分)합니다. 앞으로 자손들이 실덕(失德)하지 않고 굶주림만 면(免)하면 되지 그 위에 더 무엇을 바라겠읍니까.”라는 말로 사양(辭讓)하고 나서 “차라리 저기 앉아 있는 매[鷹] 두 마리를 저에게 주십시오.” 하였다.

  태종은 청(請)을 들어주는 동시에 화공(畵工)으로 하여금 양도공의 초상(肖像)과 두 마리 매를 그리게 하여 하사(下賜)했다.

  양도공이 매를 청한 것은 임금이 매사냥을 즐김으로서 정사(政事)를 등한(等閒)히 하거나 민폐(民弊)를 끼치는 일을 경계(警戒)함이었고, 태종이 매 그림을 그리게 한 것은 신하(臣下)의 깊은 뜻을 알고 수명(壽命)의 한계가 있는 매를 그림으로 그려줌으로써 오래 기념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양도공의 아버지 원계(元桂)는 엄밀히 따져 정몽주(鄭夢周)에 못지않은 고려(高麗)의 충신(忠臣)이었다. 원계는 홍건적(紅巾賊)이 고려로 침략했을 때 순찰사(巡察使)로서 적을 격파(擊破)하였고, 왜구(倭寇)를 물리치는 데도 많은 공(功)을 세웠다.

  최영(崔瑩)의 주장으로 고려(高麗)가 명나라를 치게 되었을 때는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조민수(曺敏修)와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李成桂)를 뒤에서 돕는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참전(參戰)했다가 위화도에서 回軍한다.

  그 후 이성계가 중망(衆望)을 얻어 왕위(王位)에 오르게 되었을 때 원계는 “우리가 고려의 은혜(恩惠)를 많이 입은 처지(處地)에 모반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버티다 대세가 어찌할 수 없음을 깨닫고 독(毒)을 마시고 자결(自決)하였다.

  『대동기문(大東奇聞)』에는 ‘고려 충신(高麗忠臣) 이원계(李元桂)’라는 제목(題目)으로

 “이원계는 태조의 형(兄)으로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또 명조(明朝)에도 문과에 올라 벼슬이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이르렀는데, 정도전(鄭道傳) 조준(趙浚) 등이 태조(太祖)를 옹립(擁立)하려는 것을 보고 아니된다고 하며 극언(極言)으로 만류하였으나 공의(共議)가 이미 결정(決定)되었음을 보고 음독(飮毒), 자결(自決)했다.”

고 기록(記錄)되어 있다.

  아버지는 이렇게 고려의 충신(忠臣)인데, 그의 아들 양도공(襄度公)은 어찌하여 태조(太祖)를 옹립하고 조선조 3대의 왕(태조․정종․태종-)을 위해서 충성(忠誠)을 하였느냐에 문제(問題)가 있다.

  원계는 자결(自決)을 앞두고 네 아들을 불러놓고 “나는 고려(高麗)의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서 이제 고려 왕조(高麗王朝)가 끝나게 되었으니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너희들은 나와 입장(立場)이 다르니 숙부(叔父: 태조)를 도와 충효(忠孝)를 다하도록 하라.”고 유언(遺言)했기 때문에 아들들은 그 유언에 따라 태조를 도왔다는 것이다.

  원계는 고려의 충신(忠臣)으로 높이 찬양(讚揚)되었어야 할 인물(人物)이었으나 조선시대(朝鮮時代)에서는 얘기되는 것이 금기시(禁忌視)되었다. 태조의 친형(親兄)이 아우의 부당(不當)한 행위를 보고 자결(自決)하였다는 것은 왕조의 정통성(正統性)에 문제가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원계의 후손(後孫)들은 5백년 동안 완풍대군(完豐大君) 이원계(李元桂)의 후손이라는 것을 내세우지 못하고 안소공(安昭公) 양우(良祐)의 후손이라든가 양도공 천우(天祐)의 후손(後孫)으로 행세(行世)하였던 것이다.

 전주 이씨(全州李氏) 양도공파의 종손(宗孫)은 다음과 같이 이어졌다.


完豊大君 元桂-襄度公 天祐(不祧廟의 주인으로 이 집안의 中始祖)-驪陽君 宏-月城君 明仁-孝常(영광 묘량에 정착)-世元-鶴-應鍾(壬亂 때 영광성 守城大將)-克燥-坦-亨復-守初-相虎-仁薰-馝遠-以錫-潤身-民秀-應百-景信-義甲-龍淵-東侯-奎憲(현재의 宗孫으로 國展 2회 特選의 동양화가, 양도공 天祐의 22대손)-基禎


  양도공파 후손(後孫)으로 현대의 유명(有名) 인물(人物)로는 이현종(李鉉淙) 씨(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와 이을호(李乙浩: 현 광주박물관장) 씨를 꼽을 수 있다.


-위의 내용은『인물계』제7호(1989.7.1 발행)에서 기획한 「종가 순례 1, PP. 49~52}에서 그대로 옮겼다. 당시 양도공 종가 대표 이동혁(李東奕) 님과, 소설가(小說家)로서 광주․전남문인협회 회장으로 재임(在任) 중이던 이명한(李明翰) 님이 취재진(取材陣)을 안내하고 자료(資料)를 제공하였다. 이명한 님 역시 양도공의 후예이다. 이상 편집자 주(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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