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범삼취 왕범삼취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09-02-11 조회수 : 4035
 
 
 

특별 기고

公凡三娶․王凡三娶

-完豐大君의 바른 家系的 位相 定立을 위하여-


                          완풍대군파 문화이사 李昌憲


필자가 완풍대군파종회의 文化理事라는 중책을 부여받은 지 어느새 8년이 지났다. 이보다 앞서, 필자는 양도공 宗家의 近親으로서 1981년에 편찬이 시작된 『襄度公派大同譜』와 『襄度公派世德誌』의 자료 수집, 번역, 집필에도 참여했으니, 미력으로나마 종사에 간여한 햇수는 어느덧 25개 星霜이 되는 셈이다.  그간 어려운 일도 많았지만 그런 만큼 적지 않은 보람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완풍대군파 10만(在南) 종원들을 대신하여 派祖의 位相을 정립하고 列先祖의 행적을 널리 연구․홍보하여 후손의 나아갈 바를 밝히는 것은, 힘들지만 의미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건대, 그 동안 필자에게 부여된 과제 중 가장 큰 것은 무엇보다도 파조 완풍대군 선조의 家系的 位相 회복이었던 것 같다.

『태조실록』의 家系 造作 기록과 現今의 誤認 실태

주지하듯이, 완풍대군 휘 元桂는 환조대왕의 長男으로 탄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조실록』의 조작 기록으로 인해 아직까지도 일부에서 이 당연한 사실에 의문이 있는 양 인식되는 것은 안타깝고도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수년 전 별도로 제작한 「실증자료」에서도 詳論하였지만, 완풍․의안 두 분을 庶系로 오인케 하는 최초의 발단은 양도공(諱 天祐)과 義安大君(諱 和)을 政敵으로 인식하였던 河崙․李叔蕃의 무리들이 태종의 後嗣에 대한 염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태조실록』「總書」의 환조대왕 가계 관련 내용을 조작하고, 태조 2년(1393)에 함흥에 세워진 『桓祖神道碑文』자손 난을 변조해서 태조실록』에 기록함으로써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掩耳盜鈴' 이라는 고사성어의 유래담처럼, 자기 귀만 틀어막는다고 해서 쩡쩡 울리는 방울소리가 없어질 수 없듯이, 비밀리에 획책된 실록에서의 가계 조작 음모는 결코 후대 일반의 인식까지 바꾸게 할 수는 없었으며, 1934년 사학자 李相佰 박사의 논문 발표 이후 실록의 완풍․의안 가계 조작 사실은 오늘날 학계의 正說이 되었다. 여기서 특기할 점은, 전문 학자들(즉, 史學者․社會史學者․法制史學者)의 경우 조선 건국 이전의 「환조신도비문」 등을 참고하지 않고도 태조~태종실록 자체의 文面만 가지고도 조작의 개연성을 유추해내었다는 점이다. 이는 말하자면, 실록의 관련 기록들이 그만큼 견강부회와 자가당착으로 엮여 있다는 반증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도, 자료를 널리 보지 못한 학자들이나 譜書 편찬자, 흥미본위의 저널리스트들은 이 조작 기록을 오인하거나 악용하여 그들의 저작물에 완풍․의안 두 어른들이 태조의 庶兄弟인 양 서술하여 麗末 鮮初 外侵을 막아낸 救國의 元勳이자 우리 全州 李門의 대표적 分派祖이기도 한 그 어른들에게 不敬을 저지름은 물론 십 수만이 넘는 많은 후손들에게까지 불명예를 안기고 있으니, 참으로 통탄스러운 일이다.

先祖에 관심 있는 완풍대군 후손이라면 근자에 발행되는 譜書나 大衆歷史書, 小說 따위에서 완풍대군 家系에 대한 황당한 기록을 접하고 불유쾌를 넘어서서 분노와 증오심에 치를 떨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적어도 필자는 그랬다. 피를 이어받은 후손 그 누구인들 진실을 번연히 알면서 그 같은 先祖 모독에 대하여 아무렇지도 않을 것인가. 先祖의 德業을 찾아내어 널리 선양은 못할망정, 전혀 사실과 다르게 선조에게 덧씌워진 불명예를 보고만 있어서는 후손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완풍대군의 어머님 李氏께서 환조대왕의 側室이었다는 것이 정녕 사실이라면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身分의 高下를 떠나 우리를 존재하게 한 근원은 그 자체만으로도 숭고하고, 天倫이란 어떤 경우라도 존엄하게 받들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이 환조대왕의 어엿한 正室 初娶夫人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찍 돌아가셨고(완풍대군의 어머님 李氏는 1333년 네 살된 大君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太祖의 生母가 아니라는 것 때문에, 그리고 死後 조선조의 건국이라는 상황의 도래로 인해 封爵은커녕 嫡室夫人의 지위조차 감추어지고, 그것도 부족하여 오늘날에 이르러서서는 태종조 奸凶들에 의해 조작된 대로 '側室' 이니 '妾室' 이니 하는 신분상의 受侮를 당해야한다는 것은 결코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완풍대군 가계의 진실

 진실은 너무나도 명백한 것이다. 앞에서, 斯界 전문학자들의 실록 자체 文面에서의 유추를 언급하였지만, 기실 완풍대군의 家系的 位相을 입증해주는 가장 중요하고도 확실한 자료는 그에 대한 최초의 문헌인 환조의 「舊 神道碑文」(1387)이며, 다음은 조선 건국 직후에 씌어진 「桓王定陵神道碑文」(1393)이다.     牧隱 李穡이 쓴 환조의「구 신도비문」에서 가장 주목되는 구절은 ‘公凡三娶(공이 무릇 세 번 장가들었고)’란 표현이다. 주지하듯, 고려 시대의 혼인제도는 一夫多妻制, 혹은 一夫幷妻制라고 하는 것으로서 한 남자가 여러 명의 동등한 자격의 처를 동시에 거느리는 형태이다. 이 비문의 표현대로 환조는 고려에 入朝하기 전 元나라 치하에서 이미 세 번 장가들었다. 비문은 환조의 세 부인을 순서대로 기록하고 있는 바, 첫 부인은 李氏로서 완풍대군(元桂)의 生母라 하였고, 다음은 崔氏로서 태조(成桂)와 趙仁璧 처의 생모, 다음은 김씨로서 和의 생모라 하였다. 비문의 이 기록은 완풍대군이 환조의 嫡長子임을 명시하고 있다.

桓王定陵神道碑文」은 태조 2년(1393) 1월 鄭摠과 權近에 의해 제작되어 그 해 9월 咸州의 동쪽 歸州에 있는 定陵의 境域에 세워졌다. 이 글은 懿妃로 추봉된 태조의 어머니 崔氏를 부각시켜 맨 앞에 내세웠다. ‘禮에는 두 명의 嫡室이 없다’는 유교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태조의 어머니인 최씨만을 환조의 配位로 추봉하고, 원래의 순서를 바꾸어 李氏를 뒤에 세운 것이다. 이제 至尊이 된 태조의 어머니를 돋보이게 하려는 기도는 당시의 상황에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 ‘王凡三娶(왕이 무릇 세 번 장가들었고)’는 적어도 이씨ㆍ김씨가 결코 측실이 아닌 多妻 중 1인의 자격이었음을 인정하는 표현이다. 태조 臨御 하에 많은 신하들이 검토하여 확정지은 이 비문에서, 명백한 사실이 아니라면 언감생심 ‘王凡三娶’의 표현을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비문은 그대로 새겨져 환조 능에 세워졌고, 이 비가 부숴지고 마모되어 광해군 4년(1612)에 왕명으로 改竪할 때도 원래의 비문대로 새겨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상에서 말한 환조의 신ㆍ구 신도비문은 성종 때의 官撰書인 『東文選』에도 가감 없이 원문대로 수록되었다. 이 사실은 태종조 왕과 일부 신료들의 은밀한 가계 조작에도 불구하고 일반의 인식은 그 조작, 왜곡을 끝내 인정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요컨대, 이상에 제시한 두 종류의 「환조신도비문」을 통해서 볼 때 실록의 완풍․의안 두 분 대군에 대한 가계 조작 사실은 너무도 분명한 것이다. 하지만, '公凡三娶' ․ '王凡三娶' 의 기록이 엄존하는 한, 어떠한 조작 기록에도 불구하고 완풍대군의 환조대왕 嫡長子로서의 位相은 입증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K.B.S 대형 사극「龍의 눈물」 사태  

『태조실록』의 조작 기록으로 인해 야기된 문제가 표면에 대두된 일대 사건은 1997년의 K.B.S 대형 사극「용의 눈물」(이환경 극본, 김재형 연출) 사태였다. 8월 17일 방영 분에서 발생한 派祖 모독 장면은 전국의 후손 모두에게 경악을 금치 못하게 했거니와, 이 사태는 그러나 章燮 파종회장 이하 우리 후손 모두의 노력에 의해, K.B.S 역사상 처음으로 극중 장면(9월 14일 추석연휴 방영 분)에서 선조 모독 장면이 시정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그 때 역시 우리 완풍대군파의 문화이사로서 문중의 창구역을 맡아 하룻밤 사이「實證資料」를 만들고, 작가․연출자 등 제작진을 만나 訂正을 설득하는 한편, 끝까지 是正이 안 되면 방송 관계자들을 死者名譽毁損罪로 고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까지 했던 필자는, 지금도 그 때 그 정도로나마 일이 무사히 해결되었다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리곤 한다.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고, 언필칭 史實에 기반해 제작했다는 수식어가 붙는 대형 史劇에서 그 모독 내용이 아무런 정정 없이 굳어졌다면 어찌 되었을까를 생각할 때마다 毛骨이 송연해지는 것이다. 당시 정정 방영을 위해 동분서주하였던 파종회장단 여러분과 법률가로서 적극 자문에 응해주고 든든한 뒷받침이 되어주었던 石淵 변호사의 崇祖精神에 다시금 깊은 감사와 함께 敬意를 표하는 바이다.


「李元桂 文獻傳承의 연구」

필자는 당시 史劇 제작진을 굴복시킨 성취감과 안도감 속에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실록의 기록들은 정정되지 않은 채 앞으로도 영원히 그대로 존재할 것이며 그 기록들을 진실이라고 誤認, 혹은 盲信하는 설익은 독자가 있는 한 또다시 派祖의 가계 모독사태는 재현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필자가 곧바로 착수한 것이 완풍대군의 일대기를 정리해 學界에 알리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가계 문제를 올바르게 辨析하고, 나아가 대군의 麗末 殉節 事實을 입증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시 재학 중이던 대학원에서 필자에게 학술진흥재단 기금을 일부 보조하며 의뢰했던 '鄭道傳 연구' 를 무리해가면서까지 '완풍대군 연구' 로 바꿔 「李元桂 文獻傳承의 연구」라는 제목으로 작성, 제출했다. 이어, 이 글의 내용을 우리 宗員 모두가 알게 하자는 章燮 종회장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이 논문 외에 종사에 긴요한 자료 몇 건을 보완해 1999년『完豐大君硏究』라는 소책자를 제작, 전국의 有志宗賢들에게 배포했다. 이 책자의 내용은 그 후 더 보완되어, 「龍의 눈물」 사태가 계기가 되어 결성된 전주이씨완풍대군파학술위원회(회장 李鉉具 박사)의 主導로 2003년에 간행한 『完豐寶鑑』에도 옮겨진 바 있다. 「이원계 문헌전승의 연구」라는 논문은 필자의 능력 부족으로 인한 拙文임에도 불구하고 그 후 완풍대군 위상 확립 사업에는 약간의 기여를 했다고 여겨진다. 이를 토대로 하여 국내 國史學者들의 저술 중 완풍대군 관련 부분의 오류를 수정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역사서에서의 완풍대군 선조에 대한 가계 기술 오류를 정정하기 위해 만났던 학자만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니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난관과 고초를 겪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도 韓永愚(서울대), 李泰鎭(서울대), 鄭肯植(서울대), 李載浩(부산대), 宋俊鎬(전북대), 李離和(재야 사학자), 千惠鳳(성균관대), 崔在錫(고려대), 李完宰(한양대), 姜秉樹(정신문화연구원), 池斗煥(국민대) 교수 등등 필자가 만난 학자들은 다행히도 깊은 實力과 良識을 갖춘 분들이라서 필자의 고증 내용에 대해 금방 수긍하고, 자신들의 著作에 오류가 있을 경우 改訂版에서의 수정을 약속해 주었다. 그분들의 학자적 양심에 경의를 표할 뿐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訂正

필자는 1998년 당시, 국내 저작물 중에서 무엇보다도 학자들이 가장 공신력 있게 생각하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속의 완풍대군 至親들에 대한 家系 서술의 오류를 정정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 취지에 동감하는 京畿大 李勳燮 교수(安昭公 孫)와 함께 우선 서울대 국사학과 韓永愚 교수 연구실을 방문하였다.(98. 8. 4) 한 교수는 이 사전의 주요 집필위원으로서 실록의 조작 기록을 여과 없이 옮겨 '양도공(李天祐' 난에서 완풍대군을 태조의 庶兄으로 표현함으로써 여러 학자들의 논문이나 서적에 오류가 생기게 한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에 자신의 주장이 옳음을 강변하였으나, 필자가 제시한 환조 新․舊「神道碑文」과 李相佰․李泰鎭 서울대 교수의 논문을 하룻밤 동안  검토한 끝에 우리의 다음날 방문 때에는 학자답게 자신의 잘못을 순순히 시인하고, 필자가 제시한 새로운 자료에 의해 자신의 저서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해당 항목을 정정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하였다. 훈섭 박사는 바로 그 자리에서 그의 양해를 얻어 소형 녹음기에 그의 정정 약속 내용을 녹취하였는데(1998. 8. 5), 그 테이프는 지금도 우리 派宗會에서 보관하고 있다. 우리가 방문한 며칠 후 韓 교수는 직접 정신문화연구원을 방문하여 事典 편찬 책임자에게 관련 내용의 訂正을 통지하였고, 그 결과는 2002년에 제작된 C.D 개정판에서 실현되어 이 사전의 모든 기록에서 완풍대군은 '태조의 伯兄' 으로 표현되었다. 2002년도의 事典 개정 작업을 재차 촉구․확인하고, 文案을 보완해 연구원 측에 제시한 이는 우리 파 학술위원인 昌洙 博士(안소공 손, 건국대 생화학과 교수)였다. 그는  越南 失鄕民의 恨을 宗事에의 헌신으로 승화시킨 이로서, 남다른 爲先心과 家門에 대한 긍지를 지닌 사람이다. 창수 박사는 이공계 학자이면서도 안소공 후예인 忠肅公 李容翊 大臣의 일대기를 바로잡아 출간을 준비하는 등 숭조 돈종을 위해 부단히 기여하고 있다.   


한국인명대사전(중앙M&B 편찬)의 정정  

우리 한국학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사전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바르게 정정되었으므로 이제 한 시름을 놓게 되었지만, 또 한 가지 문제가 아직 남아 있었다. 이 事典을 토대로 하여 제작된 『韓國人名大事典』에는 아직 이 문제가 정리되지 않은 것이다. 필자는 2004년 8월, 전남 영광군에서 간행한 서적의 양도공 관련 오류 정정을 위해 章燮 종회장님과 함께 그 간행물의 인용 근거라는『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정정 확인을 위해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을 방문했던 차에 이 사실을 재확인하였고, 그래서 그 후 또 파종회장과 文鎬 총무이사(都正公宗親會長)를 모시고 이 곳을 방문하여 관계자들에게 訂正을 촉구한 바 있었다.

그런데 금년 1월 중순, 이 문제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 백과사전 편찬부를 재차 방문하였을 때 만난 姜秉樹 博士(한국학정보센터 선임편수연구원)는 놀랍게도 완풍대군 家系의 실록 조작 사실은 물론, 수년 전의 事典內容 訂正請求 件에 대해서도 그 始末을 훤히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몇 해 전 韓永愚 교수의 訂正 承認書를 받아 사전 訂正 作業을 직접 실행한 사람이었다. 그는 先祖 位相 確立을 위한 필자와 우리 파종회장의 집념과 정성에 충심으로 감복한다며, 모든 내용을 자신이 이해하고 있으니, 완풍대군파종회에서 正式으로 『한국인명사전』 정정을 촉구하는 公文을 보내주면 자신의 직책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다 해보겠노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우리 파종회는 1월 25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 앞으로 공문을 보냈고, 드디어 2월 7일자로 회신 공문이 왔다.(금년부터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은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개명됨.) 그 내용은,  필자 한영우 교수의 승인에 의해 이미 정정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근거해서 앞으로 간행될 『한국인명대사전』의 再版本을 고치되, 在庫本은 스티커를 붙여서 수정하겠다는 것이었다. 실로 姜 博士의 진심 어린 협조가 이루어낸,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이제, 그 公信力으로 인하여 學界에서 가장 권위 있고, 그래서 가장 많이 引用되는 두 개의 事典은 진실에 입각하여 확실히 정정되었다. 앞으로는 실록의 조작 기록에도 불구하고 학자, 저술가들의 완풍대군 가계에 대한 誤認과 混同은 줄어들 것이고, 그들의 著作物에 설령 오류가 발생한다 해도 두 가지 사전이 진실을 대변하는 한 그것은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것이 될 것이다.


良書가 惡書를 驅逐하도록

작년 12월 말, 市中 서점을 돌며 先祖가 관련된 새로운 서적들을 살피던 필자는 또 한 번 경악했다. 大衆作家 朴某가 쓴 책에서 실록의 惡意的 조작 기록을 옮겨 煽情的으로 서술해 놓은 구절을 본 것이다. 필자는, 지체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즉시 파종회장께 사태를 보고하고 해당 출판사와 作家에게 항의한 뒤  그 날로 당장 작가의 작업실에 등기 속달로 실증적 考證 資料를 보냈다. 다음날 오후 보내준 자료를 읽은 작가와 장시간의 격렬한 토론을 거친 뒤, 결국 그에게 내용의 일부를 修正하겠다는 應答과 구체적 文案을 받아냈지만, 뒷맛은 여간 씁쓸한 게 아니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더니, 그와 같은 비전문가가 문제였다. 앞으로도, 역사에 대한 전반적 소양이 없는 자가 저작물의 판매 부수를 늘리기 위해 煽情的으로 史料를 취급할  경우 그것을 일일이 어떻게 막아낼 것인가. 결국은 眞實의 승리로 귀결되겠지만 그것은 엄청난 소모전이 될 가능성이 크고, 자칫 상대편의 商魂에 말려들어 본의 아니게 그의 利益에 기여할 수도 있는 일이다. 필자는 그래서 생각했다. 惡貨가 良貨를 구축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이 적어도 우리 출판가에서는 반대로 적용되게 하여, 良書가 惡書를 驅逐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우선 우리가 객관성 확보를 위하여 후손이 아니면서 해당 분야에 권위 있는 正統 史學者에게 先祖에 대한 올바른 자료를 풍부히 제공하고, 그것이 제대로 반영된 그의 著作物이 베스트셀러로서 대중의 사랑을 받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면 그 책은 올바른 판단의 기준으로서의 '체' 가 되어 잘못된 책들을 거르고 몰아내는 역할을 해낼 수 있겠기 때문이다. 필자의 이 같은 의견은 파종회장이 연초에 소집한 긴급 대책회의에서도 만장일치로 통과되었고, 필자는 지금 그 실행을 위해 實力과 良識을 갖춘 正統 史學敎授와 다방면으로 접촉․교류 중이다. 머잖아, 우리 후손들의 입장을 충분히 대변할 수 있는 眞實되고 가치 있는 大衆的 著作物이 세상에 나오리라고 본다.


宗員 모두가 愚公移山의 자세로써 이 문제를 해결해야

완풍대군의 바른 家系的 位相 定立이라는 우리 종원들의 간절한 念願과 輿望을 실현하기 위하여 오랜 기간 동안 東奔西走해왔던 필자이기에, 이 글을 쓰는 감회는 실로 남다르다. 史學 전공자도 아닌 필자가 오직 先祖의 바른 位相을 지켜야한다는 집념 하나만으로『朝鮮王朝實錄』이라는 거대한 山, 거대한 障碍物-적어도 우리 문중에게는 장애물이다-을 옮기기 위해 잠 못 이룬 밤은 또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急流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 둑의 구멍을 연약한 팔뚝으로 밤새워 막았다는 네덜란드 소년의 이야기처럼 더러는 비장하게, 잠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없는 재주와 힘을 다 쏟아온 것도 사실이다.    돌이켜보건대, 완풍대군의 家系的 位相 正立에 대해서는 양도공 大宗孫이자 필자의 從祖考인 敬堂 공(휘 龍淵), 王考 貞齋 공(휘 吉淵)께서 生前에 부단히 관심을 가지고 心慮하셨고, 일찍이 嚴親(東)께서도 靈光에서 上京하여 仲父 東健 氏와 함께  <承政院日記> 에서 ‘大君’ 추봉 기사를 찾아냄으로써 당시 完豐大君派宗會의 협력 하에 全州李氏大同宗約院으로 하여금 諱元桂의 完豐大君 追封 사실을 推證․告示하게 하고(1976년 2월 4일자), 이후 모든 종약원 간행물에서 諱元桂의 봉호로 大君의 正稱을 사용하게 한 바 있었으니, 이 문제의 해결은 실로 필자에겐 宿緣 깊은 課業이요, 召命이 된 셈이다.        

아무튼,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實錄이 존재하는 한 앞으로도 여러 서적에서의 오류는 再現될 수 있다. 필자와 파종회, 그리고 有志 宗賢들의 前述한 바와 같은 수많은 조치, 대비책에도 불구하고 실록을 盲信하는 설익은 독자, 설익은 연구자는 우리 앞에 또 출현하게 마련인 것이다. 그럼에도 人類의 文化遺産으로까지 지정된 實錄은 一字一句도 고칠 수는 없는 일이니, 이 기막힌 사태를 어찌할 것인가.

방법은 오직 한 가지다. 10만 후손 모두가 한결같은 마음으로 시중에 나도는 선조 관련 저작물들의 오류를 감시하고, 줄기찬 노력으로 그 오류들을 정정시켜야 한다. 事必歸正이란 말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그리고 眞實과 精誠은 반드시 사람을 움직인다. 결국은 山을 옮겼다는 옛날 愚公의 고사처럼, 眞實로써 武裝한 우리 10만 후손의 合心과 執念은 實錄의 기록조차도 無力․無價値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간 완풍대군 선조의 바른 位相 定立을 위해 心血을 기울여주신 學術委員 여러분, 이 문제의 結實을 위해 정신적․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 章燮 派宗會長님 이하 宗員 여러분들께 깊은 感謝의 뜻을 전해 올리면서 이 글을 맺는다.(2005.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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