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 눈물' 정정에 즈음하여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09-02-11 조회수 : 3732
 
 
 

사극 ‘용의눈물’ 정정 방영 실현에 즈음하여


이창헌(완풍대군파 문화이사)


1997년 9월 14일 일요일 밤 10시, 경향에 산재한 우리 완풍대군(휘 원계) 후손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근 한 달간을 가슴 죄며 안타깝게 기다렸던 이 시간, 완풍대군과 우리 후손들의 명예는 일거에 회복되고 있었다. K.B.S의 정정 방영 직후, 이번 사태 해결에 창구역을 맡아 동분서주했던 필자에게도 전국 각지 종현들의 감사 전화가 쇄도했다.

 8월 17일 그 무덥던 날 밤, 선조의 가계에 대해 철저히 왜곡한 사극의 장면을 접하고 송구스러움과 모멸감에 몸서리치며 잠을 설쳤던 후손들로서는 이날의 벅찬 감회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피는 정녕 물보다 진한 것이었다. 전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이 말. 하지만 필자는 이번 사태에서 보여준 수많은 후손들의 함성과 애타는 절규 속에서 비로소 그 의미를 실감했다. 사실 이번의 결실은,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선조님들과 우리들 자신의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하신 장섭 종회장님을 위시한 10만 후손들의 집념과 투지가 만든 작품에 다름 아니었다.

차마 옮길 수조차 없는 왜곡 방영이 있던 밤, 시골집에서 와병 중이신 아버님과 비분어린 통화를 나눈 후 거의 뜬 눈으로 뒤척이며 밤새 떠올린 생각들, 그리고 여명이 되자마자 각처에서 걸려온 문중 어른들의 통한에 찬 하소연들을 지금 예서 다 소개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필자는 이 때 분명히 느낀 것이 있었다. 우리 족인들의 핏속에 끓고 있는 숭조 의식의 크기가 얼마만한 것인가를, 그리고 현 시점에서 내게 부여된 책무의 무게가 어느 정도의 것인가를….

왜곡 방영이 이루어진 다음날 이른 아침, 종회장님을 위시한 회장단 및 양도공 재경종친회 임원 여러분들과의 긴급한 회합이 이뤄졌고, 다각적인 의견 교환이 있었다. 대 K.B.S 창구를 단일화하는 것이 보다 효율적이리라는 종중 어른들의 의견 집약 아래, 정정 방영 실현이라는 중차대한 임무를 부여받은 필자는 그 순간부터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뛰었다.

서점가를 뒤져 원작(월탄 박종화의 『세종대왕』)을 구해 읽고, 사극 제작진 및 한국방송공사 임원들의 연락처를 알아냈으며, 법적 대처의 사례도 탐문했다. 그리고 귀가하여서는 철야작업을 통해 진실을 밝히는 고증 논문을 작성하였다. 하루 만에 입증자료 수십 건을 수집․정리한다는 것은 시간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불가능 했지만, 다행히도 필자에게는 유년 이래 조부님(정재 휘 길연)께서 끼쳐주신 보학에 관한 약간의 지식과, 그것이 동기가 되어 소년시절부터 모은 선조 관련 서적들, 그리고 미흡하나마 본인이 틈틈이 손수 번역한 행적자료들이 구비되어 있었기에 이를 토대로 단 하룻밤 만에 완풍대군이 환조대왕의 적장자임을 명확히 입증할 수 있는 반증논문을 제작․인쇄하여 작가에게 전달할 수가 있었다. 솔직히, 우둔하고 자질이 부족한 필자로서는 수십 년에 걸친 준비 과정과 자료가 없었더라면, 나름대로의 근거를 가지고 대항하는 ― 물론 그 근거라는 것이 터무니없이 조작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 제작진들을 신속히 제압(?) 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방영 후 단 이틀 후에 이뤄진 설득력 있는 「실증자료」 제시와, 거족적 단합에 의한 법적 투쟁 불사의 표명은 작가․연출가 등 제작진들에게 적잖은 파장을 안겨 주었다. 이는 곧 우리 문중의 위상에 대한 인식, 곧 창구역을 맡은 필자의 배후에 포진한 각계각층의 명사를 포함한 언필칭 10만의 후손들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대상임을 인식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결국 이 사극의 작가(이환경)는 특유의 자존심과 고집을 꺾고, 정정 방영 요구를 수용하였다. 정말 다행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며칠 뒤 연출자(김재형)에게 경과를 알아볼 겸 감사 전화를 했더니, 대본을 본 제작진들이 정정 장면 삽입은 극 흐름의 일관성을 해친다고 하여 극력 반대하니 자신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다 된 밥에 재 뿌린 격이었다.

이 청천 벽력같은 답변에 놀라, 상대방의 면담 거절에도 불구하고 주소지 하나만으로 곧바로 『서울시 교통지도』를 사 들고 택시기사, 경찰, 상점주인의 안내를 받아 일면식도 없는 노 연출가(김재형․ 62세)의 집에 불쑥 찾아가,  어제 밤 철야 촬영으로 인한 그의 곤한 오전 잠을 깨운 것은 분명 만용이었다. 아니, 그와 그의 가족들이 생각하기엔 차라리 광란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돈키호테식 방식이라도 감행하지 않으면 우리 선조님들과 후손들의 명예는 영원히 되찾을 수 없게 되리라는 판단이 필자를 여지없는 무뢰한(?)으로 만들고 말았다.

다행히도 연출자는 필자의 무례를 그다지 탓하지 않았다. 그도 역시 내로라하는 사족의 후예였기에(그는 안동 김씨의 명장 김사형의 후예로 부친은 보사부 차관을 지낸 김학묵 씨였다.) 필자의 저돌적 행위를 지극한 숭조 정신의 발로로 이해하여 오히려 감동했다며 마음을 열었고, 부족한 잠을 참으며 준비한 자료 설명을 끝까지 경청해 주었다. 그리고는 필자를 현관 밖까지 정중히 전송하며 분명히 약속했다. 자신이 이해한 진실 그대로 꼭 시정 방송을 하겠으니, 기다려 달라는 거이었다.


이번 사태 해결은 실로 수많은 난관과 곡절을 겪으며 이뤄낸 결실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보유한 이른바 ‘역사기록’-즉 『조선왕조실록』이 정략적으로 조작된 것임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았다. 또, 그 문제를 우리 자료와 논리로써 해결한다 하더라도 앞으로 계속될 대하 사극 진행에서의 보복적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들의 비위를 무작정 거스를 수도 없는 탓이었다. 비유컨대, 납치된 가족 중 한 사람을 구출해낸다 하더라도 나머지 가족은 상당기간 저들 손에 맡겨두어야 하는 경우가 바로 우리의 경우가 된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해내었다. 비록 그 창구역을 불초한 본인이 맡았지만, 이번 성과는 어디까지나 문중 여러 어른들의 지혜와 일사불란한 협조가 이루어 낸 쾌거였다. 어쩌면 자찬으로 들릴 수도 있는 이 글을 쓰는 이유 또한 “진실은 언젠가는 승리하고야 만다.”는 평범한 진리와 함께, 모든 종원들의 집념과 투지가 하나로 모아졌을 때 그것은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우리 종원 모두에게 알리고 싶어서인 것이다.

내일이면 중추절, 정정 방영 장면을 녹화하고 서둘러 탄 호남선 열차의 차창 밖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유난히 길고 지루했던 무더위를 보낸 우리 10만 종원들에게 올 추석은 참으로 잊을 수 없는 뜻 깊은 것이 될 것이다. 다시금 그간 충심을 다해 이번 사태 해결을 위해 힘써 주신 여러 어른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해 올린다.(1997.9.14 자정)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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