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섭 대부님을 추도함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09-02-13 조회수 : 4349
 
 
 

양섭(良燮) 종현(宗賢)을 추도(追悼)함


족손(族孫) 창헌(昌憲) 삼가 지음


작년(昨年) 초가을 어느 날 우리는 한 분의 훌륭한 종현(宗賢)을 여의었다. 평소 선조(先祖)를 위한 정성(精誠)과 사명감(使命感)이 남달랐던 양섭(良燮) 대부(大父)께서 위선(爲先) 사업(事業)에 대한 수많은 계획을 실천(實踐)하시던 중에 병마(病魔)로 인해 허무(虛無)하게 세상(世上)을 뜨신 것이다.

양섭(良燮) 대부(大父)는 1941년 영광군 묘량면 운암 마을에서 휘 문의(文義)와 광산 김씨(光山金氏) 사이의 셋째아드님으로 태어났다. 묘량면 공무원(公務員)이었던 고(故) 덕섭(德燮) 종현, 그리고 지금 양도공 재경종친회의 고문(顧問)으로 활동하시는 화섭(和燮) 종현 두 분이 공의 실형(實兄)이시다.

공은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양도공(襄度公) 휘(諱) 천우(天祐)의 17세손이고, 선조(宣祖) 때에 생원과(生員科)와 진사과(進士科)의 양시(兩試)에 합격한 후 조정(朝廷)의 부름을 받아 소촌도(召村道) 찰방(察訪)을 지내던 중 간당(奸黨)들에게 화(禍)를 입은 기축육현(己丑六賢)의 한 분 만취당(晩翠堂) 휘(諱) 황종(黃鍾)의 11세손이며, 선조(宣祖)의 특명으로 태릉참봉(泰陵參奉)에 제수(除授)된 휘 극개(克揩)의 10세손이다.

공의 역대 선조(先祖)들은 가문(家門)의 빛나는 전통(傳統)을 계승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특히 할아버님은 휘가 윤홍(潤弘), 호(號)는 만운(晩運)이라 하였는데, 이분은 우리 양도공 문중(門中)을 위해 많은 희생(犧牲)을 치른 분이었다. 을사년간(乙巳年間: 1905)에 양도공(襄度公)의 신도비(神道碑) 비용(費用) 문제로 문중(門中)이 곤경(困境)에 처했을 때 만운 공이 이 일을 대신 감당(堪當)하여 3년간이나 감옥(監獄)에 매인 몸이 되었던 것이다.

 양섭 대부께서는 어려서부터 총명(聰明)하고 매사에 민첩(敏捷)해서 집안의 기대(期待)를 듬뿍 받았다고 한다. 열심히 공부하여 명문(名門) 광주고등학교(光州高等學校)에 입학하고 여기서도 우수(優秀)한 성적(成績)을 기록했으나 대가족(大家族)의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하여 명문대(名門大) 진학의 꿈을 접고 군문(軍門)에 들어가 반생(半生)을 봉직(奉職)하였고, 전역(轉役) 후에는 건설(建設) 사업으로 다소(多少)의 성공(成功)을 거두었다.

필자(筆者)가 대부를 처음 뵙게 된 것은 대학(大學) 시절이었다. 당시 대부(大父)는 군복(軍服) 차림이었는데, 종가(宗家)를 방문하여 사당(祠堂)에 봉심(奉審)하고 가친(家親)과 담소(談笑)를 나누고 계셨다. 선조(先祖)의 행적, 종가(宗家)의 역사 등에 대한 관심이 유난히 높았던 이분에 대해 필자는 경의(敬意)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친께서는 일가(一家)이자 소학교(小學校) 시절 동무였던 덕(德: 德燮 氏의 字)이 씨의 아우님이라고 소개하시며, 위선심(爲先心)이 근래에 보기 드문 분이라고 칭찬하셨다.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대부(大父)는 고향 방문 때마다 종가(宗家)를 찾아보곤 하는 분이었으니, 가친(家親)께서 탄복(歎服)하시는 것도 무리(無理)는 아니었다.

몇 년 전 대부께서는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상경(上京)하여 필자의 누옥(陋屋)을 찾으셨다. 한 보따리 문서(文書)를 맡기시며, 당신이 족보(族譜)와 실록(實錄), 야사(野史) 등에서 직접 수집한 태릉참봉(泰陵參奉) 휘(諱) 극개(克)의 생평(生平) 관련 자료라면서 필자에게 그 번역(飜譯)과 정리(整理)를 의뢰하셨다. 그 때 대부께서는 참봉(參奉) 공 이하 소종중(小宗中)의 석물(石物), 입비(立碑) 등의 일을 자신의 책임 하에 완결(完決)하고자 심혈(心血)을 기울이고 계셨던 것이다. 상당 기간, 그 추진(推進)하시던 일들을 도와드리면서 필자(筆者)와 대부(大父)와의 정의(情誼)는 더욱 깊어졌다.  

대부께서는 성품(性品)이 소탈(疎脫)하고 다정다감(多情多感)한 분이었다. 안부(安否) 전화(電話)도 먼저 주시고, 사소(些少)한 도움에도 두고두고 깊은 감사(感謝)를 표시하셨다. 필자의 가친(家親)에 대해서는 언제나 각별(恪別)한 경의를 표하며 친근히 모시고자 애썼고 건강(健康)을 염려하였다. 필자가 사례(謝禮)의 말씀을 드리면, 한 일가(一家)로서 종중(宗中)에 헌신(獻身)․ 봉사(奉仕)하시는 분에 대한 보은(報恩)의 마음일 뿐이라고 하며 겸연쩍어 하셨다.

 필자는 일찍이 대부의 중형(仲兄)인 화섭(和燮) 대부로부터 그분에 대한 눈물겨운 미담(美談)을 들은 바 있다. 대부는 젊은 시절 군대(軍隊) 복무(服務) 중에 월남전(越南戰)에 파병(派兵)되어 생사(生死)를 넘나드는 전장(戰場)에서 한때를 보냈다. 그때 대부는 그야말로 피로써 얻은 그 급료(給料)를 오랜 병환(病患)에 시달리던 백형(伯兄)에게 송금(送金)했고, 백형(伯兄)의 별세(別世) 후에는 그 유자녀(遺子女)들의 학자금(學資金)을 조달(調達)했다. 그럼에도 대부는, 비교적 가까웠던 필자에게조차 그런 일들을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대부는 생존하신 화섭(和燮) 대부에게도 우애(友愛)가 극진했다. 아무런 수입(收入)이 없는 형님을 위해 자신의 용돈을 나눠 송금(送金)했다. 뿐만 아니라, 위선사업(爲先事業)이나 종중 행사에 대한 헌성금(獻誠金)도 그 명의(名義)는 항상 형님에게 먼저 돌렸다. 돌아가시기 직전에도 대부는 홀로 지내시는 백형수(伯兄嫂)를 위해 고향(故鄕) 마을에 새집을 지어드리노라 과로(過勞)하였고, 자신의 깊어가는 병환(病患)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가친(家親)께서는 대부(大父)의 장례식(葬禮式) 날, 다른 중요한 행사(行事)를 치르던 도중이었지만 황급히 자리를 나와 장지(葬地)를 찾으셨다. 달포 전, 대부가 투병 중이던 화순 병원을 방문해 위문한 바 있었던 가친(家親)은 관절(關節) 통증(痛症)으로 인해 몹시 불편한 몸이심에도 불구하고, 도보(徒步)로 운암동(雲巖洞) 후록(後麓) 구천동(九川洞)의 산기슭에 마련된 장지(葬地)까지 올라가셔서 유족(遺族)들을 위로(慰勞)하면서, 대부와의 오래고도 두터웠던 인연(因緣)을 회억(回憶)하셨다. 이 날 공무상(公務上) 장지(葬地) 참석이 불가능했던 필자는 멀리서나마 간절히 명복(冥福)을 빌 수밖에 없었다.

대부께서는 현숙(賢淑)하신 부인(婦人)의 내조(內助)를 받아 의학박사(醫學博士)인 장남 상록(常錄)을 위시한 2남 1녀의 자녀(子女)들을 훌륭하게 교육(敎育)시켰으며, 이들은 지금 사회의 유용(有用)한 인물(人物)이 되어 봉사(奉仕)하고 있다. 천붕지통(天崩之痛)이라 하였거니와, 존경(尊敬)하던 아버지에게 봉양(奉養)할 기회(機會)를 잃은 자녀(子女)들이 얼마나 상심(傷心)하고 있을 것인지를 생각하면 사뭇 마음 아프다. 이 지면(紙面)을 빌어 유가족(遺家族)들께 심심(甚深)한 위로(慰勞)의 뜻을 전한다. 

정녕 대부(大父)께서는 효우(孝友)를 누구보다 독실(篤實)히 실천하고 숭조(崇祖) 돈종(敦宗)을 위해 최선(最善)을 다한 분이었다. 하지만, 선행(善行)을 묵묵히 실천했을 뿐,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 자랑하지 않는 군자(君子)였다. 이런 분이 오래오래 장수(長壽)하셨더라면 문중(門中)을 위해 많은 헌신(獻身)이 있었으련만 끝내 병마(病魔)를 이기지 못하고 귀천(歸天)하셨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필자 창헌(昌憲), 이제 다시는 대부(大父)의 다정(多情)하고 진심(眞心) 어린 음성(音聲)을 들을 수 없음을 사뭇 슬퍼하면서, 대부(大父)를 아는 모든 종원(宗員)들과 더불어 명부(冥府)에서의 안식(安息)을 거듭 기원(祈願)한다. (2007. 0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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