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정(동혁) 종현의 헌신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09-03-18 조회수 : 5526
 
 
 

추정(동혁) 종현의 헌신


완풍대군파종회장 이장섭(李章燮)


  1992년 12월 28일, 그날은 내가 국립농산물검사소 전남지소장직을 끝으로 정년퇴임을 하던 날이었다. 그 동안 중책을 맡아 대과(大過) 없이 후임자에게 직무를 인계하게 됨을 퍽 다행스럽게 여겼던 나는 그날 나를 찾아준 많은 선후배, 동료와 여러 분야의 지인(知人)들을 보며 사뭇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그런데 이날 그 장소에 나와 주신 분들 중에는 뜻밖에 몇 분의 일가분들도 계셨다. 그분들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감격에 겨워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대체 오늘 행사를 어떻게 아시고, 나를 위해 여기까지 찾아와주셨다는 말인가. 실로 한 핏줄을 나눈 일가란 이렇게도 좋은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날 찾아주신 일가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깊이 간직하고 있다.

  그때 내방하신 일가들 중 가장 낯익은 분이 당시 양도공 종손(宗孫)을 대리하시던 추정(秋汀) 동혁(東奕) 족장이었다. 어려서부터 양도공 선조에 대한 흠모의 정이 컸던 나는 공무(公務) 중에도 간간이 틈을 내어 종가의 부조묘(不祧廟)를 참배하곤 하였는데, 그 때마다 반갑게 맞아주시며 선조의 일화와 종가의 내력을 자상하게 설명해주시던 분이 바로 추정이었다. 풍채(風采) 좋고 미목(眉目)이 수려하면서도 항상 단아(端雅)한 모습에 정중하고 온화한 미소를 머금으며 내방객을 맞아주셨던 추정의 장년(壯年)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는 나보다 2년 위 기사생(1929)인 추정을 뵌 뒤 처음에는 그의 단정한 외모와 인품에 매료되었지만, 점차 그 친지들을 위시한 주변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분의 평생에 걸친 절조와 문중 헌신에 대해 크게 감동하였다.

  추정은 500년 전통의 종가집안에서 경당의 계제(季弟)인 정재(貞齋) 공 길연(吉淵)의 장자로 태어났다. 왜정 때 호남의 명문사학 고창고보(高敞高普)를 해방과 함께 졸업한 뒤 당시 호남 유일의 민립대학인 조선대학 정치학과를 1회로 졸업하였다. 입학 시 우수한 성적과 출중한 외모로 신입생 대표로 선임되었을 만큼 중망이 있었던 그이고, 또한 대학출신자의 희소가치라는 시대 현실로 인해 졸업 후 어느 분야이든 진출하면 그대로 장래가 보장이 되는 청년 추정의 위상(位相)을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추정은 민족 분열과 좌우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수립된 단독정부에 대해 크게 실망하였고, 이후 어떤 형태의 사회참여도, 입신양명의 길도  거부하였다. 향리에 은둔하여 빈한하게 살지언정 잘못된 현실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신념을 실천한 것이었다. 그는 다만, 우리 선조들이 난세에 처해 그랬던 것처럼, 낮에는 밭 갈고 밤에는 독서하면서 수신(修身)과 효우(孝友)에만 전념하며, 이에 기반한 숭조 돈종 의식의 고양과 전통 유교문화의 진흥을 위해 진력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넉넉지 못한 형편에도 부모를 극진히 봉양하며 아래 다섯이나 되는 동생들을 교육․출가시켰으며, 중시조인 양도공 이하 열선조(列先祖)들에 대한 위선(爲先) 사업을 자신의 평생의 소명으로 생각하며 많은 일을 추진하였다.

  우리 종중에서 이루어진 크고 작은 많은 종사에 그의 정성이 스미지 않은 데가 없다 할 정도로 추정의 한평생은 종사와는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는 우리 양도공 문중을 중흥시킨 경당 공의 장질(長姪)로서 백부를 도와 20대 약관 시절에 이미 담양 등지의 위토(位土)를 정리하였는가 하면, 한국전쟁 직후에는 양도공파 대동보인 갑오보(1954)를 편찬하고 보완하는 데 많은 힘을 쏟았고,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동보 갑자보(1984) 편찬 시에는 보사(譜事)의 총무로서 만 2년간을 봉사하여 거질의 파보와 방대한 양도공파세덕지를 편수하였다.

  추정의 획기적인 문중 기여는 무엇보다도 보사 후에 이루어진 종중 유물과 유적지들의 문화재 지정을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추정은 600년 간 전해오는 귀중한 양도공의 유물 및 종가의 보존에 후손들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며, 따라서 지정문화재로 등록되는 것만이 영속적이고 안전한 보존, 관리의 방안이며 이의 추진이야말로 종사의 최우선이 되어야 함을 누구보다 먼저 인식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의 추진에는 참으로 많은 난관이 가로막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여러 면에서 많은 비용이 소요되었지만 당시의 문중 형편상 어떠한 재정적 지원도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추정은 어려움 속에서도 선조의 자료를 발굴, 정리하여 우리 유물, 유적들의 문화재 등록 당위성의 근거를 마련하는 한편, 관계 요로(要路)에 호소한 결과 드디어 1987년 6월 1일 양도공을 모신 부조묘와 종가 본채(이규헌 가옥: 전남도 민속자료 제22호), 영정, 회맹축․이응도 목판 등이 지방문화재(전남도 문화재자료 제146호)로 지정될 수 있게 하였다.

  이는 실로 3년에 걸친 고심과 분투에 의한 결실이었다. 이로써 우리 문중은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마련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쾌거를 이룬 것이다. 즉, 종가 관련 유물의 문화재 지정은 곧 영당사의 문화재 지정의 근거로 작용되었을 뿐더러, 그 후 퇴락한 종가 관련 건물 모두를 지금까지 5억여 원에 이르는 공공재정에 의해 매년 보수해왔으니, 그 효용성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할 것이다.

  문중 종원들 모두의 염원이었던 영당사(묘장서원)의 문화재 지정에 대한 추정의 역할 또한 적지 않았다. 도유사 강연(康淵) 종현과 대연(大淵) 영당사유적보존회 이사장, 그리고 용주(容珠) 종회장을 위시한 많은 양도공 후손들의 수년에 걸친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자료의 부족으로 교착 상태에 빠진 이곳의 문화재 추진 사업이었는데, 추정이 오랜 세월에 걸쳐 발굴해 제시한 정조대왕 이래의 각종 완문(完文), 영당사 병설 영신학교(英新學校) 서류 등 근거 문헌이 관계 전문가들을 설득시킴으로써 문화재지정에 중대한 계기로 작용했던 것이다.

  추정의 문중 기여는 대외적 활동에서도 현저하였다. 1980년대 초엽 그는 오산창의사의 대표로 취임하여 10여 년 간 봉사하며 우리 선열들의 위대한 구국 투혼을 선양하고 민족정기의 함양을 도모하였다. 오산창의사는 임란 초기에 장성 남문에서 창의한 72현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전남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에 있는데, 우리 종중의 선조 중에서는 그 때 수창(首倡)으로 참여한 사매당(四梅堂) 휘 응종(應鍾)을 위시하여 그 아우님 한천당 홍종(洪鍾), 아드님 우헌공 극부(克扶)와 죽헌공 극양(克揚), 삼종손 우봉공 근(根) 등이 창의 대열에 합류하여 왜적을 방비하였으므로 이 사당에 배향되어 계시다. 이 남문창의에 대해 추정은 1982년 정치인 김녹영(1984년 국회부의장 역임.) 등 전국적 명망가들과 대대적인 기념사업을 벌이고, 기념사업회장인 이을호(李乙浩) 박사(양도공 20대손, 당시 광주박물관장)와 함께 학술회의를 개최하여 그 역사적 조명을 시도하는 한편, 독립기념관에 임란 당시의 격문을 국역한 어록비를 건립하고, 창의비문의 탁본, 창의록 등을 전시한 바 있다. 이로써 우리 종중 선조들의 국난 극복사에서의 위상은 한껏 제고되었고, 학계의 주목을 받아 유수한 학자들의 논문에 등재될 수 있었으니, 그 의의는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것이라 하겠다.

  추정이 이룩한 공적은 근래 조성된 수성사의 건립 과정에서도 매우 두드러졌다. 임진수성사는 임진왜란 당시 영광에서 창의하여 군성(郡城)을 지켰던 55명 의사(義士)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드리며, 그 충의를 기리는 사당이다. 임란 당시 왜적의 침략으로 국가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하자 전 만호 강태(姜泰), 선양정  정희맹(丁希孟), 진사 수은 강항(姜沆) 등 영광에 거주하던 선비들은 사매당을 수성대장으로 추대한 뒤 삽혈동맹하여 목숨 바쳐 성을 지킬 것을 결의하고, 방위의 방략에 따른 부서를 정하여 활동하였다. 이 사당은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고, 구국 대열에 동참한 의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그 후손과 유지(有志) 인사들에 의해 건립되었는데, 추정은 사매당의 15대손으로서 이사장인 대연(大淵) 종현과 더불어 이 기념사업에 병든 몸을 이끌고 처음부터 참여해 기여해왔을 뿐더러, 이어 건립된 수성사묘정비의 비문도 찬술한 바 있으니, 이는 사업회 참여 인사들의 중망에 의한 것이었다. 병고(病苦)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위선심 하나로써 이 현창사업에 노고를 아끼지 않은 추정의 혈성을 생각하면 절로 고개가 숙여질 따름이다.

  앞에서 나는 추정의 문중 헌신에 대해 주요한 몇 가지 사업들을 열거해보았거니와, 이 밖에도 추정이 우리 문중의 위상(位相) 제고를 위해 공헌한 바는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일생을 두고 우리 양도공 문중의 모든 종사에 참여해 600년 문중의 전통을 지켜내고 수립한 분이니, 세세한 공적이야 다 거론하여 무엇하겠는가. 그러나, 완풍대군파의 종회장으로서 내가 특히 기억하고 싶고, 고맙게 느끼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그가 젊은 시절 완풍대군의 위상 확립을 위해 분투노력한 끝에 완풍대군 후손들의 숙원을 해결한 것이다. 

  즉, 역사서 등에서 완풍대군(完豐大君)의 가계적 위상이 왜곡되어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조차 우리의 파시조 완풍대군(휘 원계)에 대해 올바른 봉호(封號)를 사용하지 않고 있음을 통탄스럽게 여긴 추정이 이를 해결하고자 1975년 겨울 긴급히 상경하여 아우 동건 씨와 함께 많은 사서(史書)들을 수탐한 끝에 드디어 <승정원일기>

 고종 9년 12월 4일의 기사에서 ‘대군’ 추봉 기사를 찾아낸 사실이다. 그리하여 당시 완풍대군파종회 임원 여러분의 협력 하에 종약원으로 하여금 휘 원계의 대군 추봉 사실을 추증(推證)․고시(告示)하게 하고(1976년 2월 4일자, 이화보 제16호 재정서), 이후 모든 종약원 간행물은 물론 다른 파들의 족보 등에서 '완풍대군' 의 바른 봉호를 사용하게 하였으니, 사실 우리의 종사에서 이처럼 중차대한 공헌이 또 있겠는가. 이 봉호 문제야말로 우리 완풍대군 후손이라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이며 중핵적인 사안이 아닐 수 없으며, 나 또한 파종회장으로서 10여 년 봉무하는 동안 종사의 가장 큰 난제가 완풍대군의 바른 위상 정립임을 인식하였던 터이기에, 추정의 이 장한 행적은 두고두고 나에게 감명을 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오늘날 우리 양도공 문중, 아니, 완풍대군파 문중의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하는 모습을 보며 가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유난히 효성스러웠던  우리 선조들에 의해 지켜진 600년의 자랑스러운 전통, 그리고 근세에 이르러서는 경당을 위시한 여러 문로(門老)들이 이룩한 문중의 중흥…. 하지만 그 뒤를 이은 추정과 같은 분이 아니었다면 현금(現今) 이처럼 빛나는 우리 문중의 위상이 이룩되었을까. 물론, 우리 문중의 오늘이 있기까지에는 참으로 많은 종현들의 헌신과 희생이 따랐던 것이 사실이지만, 평생을 두고 위선사에 봉사하여 이처럼 커다란 공헌을 한 이는 과연 몇 분이나 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같은 선조를 모시는 종원의 한 사람으로서, 오직 투철한 위선심으로써 우리 선조들과 문중의 위상을 높이고 후진들에게 올바른 삶의 지표를 제시해주신 추정이 한없이 감사하고 자랑스러울 따름이다.

  이태 전 어느 여름날, 나는 오랜 세월 힘겹게 투병 중인 추정이 안타까워 영광 그의 향리에 다녀온 적이 있다. 추정은 환후 중임에도, 특유의 단아하고 흐트러짐 없는 몸가짐으로 방문객을 환대하며 그간 새로 정비된 종가 부조묘, 영당사, 수성사 등을 안내하셨다. 그는 종사의 어제와 오늘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 올바른 방향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그때 나는 물경 60여 년의 종사 참여 경험에서 이루어진 그의 혜안(慧眼)에 우선 감탄하였고, 아직도 식지 않는 위선(爲先)에의 정열에 감동을 금할 수 없었다. 추정의, 조상을 위하는 한결같은 지극한 마음에 울컥한 심사를 감출 수 없었던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손을 꼬옥 잡았던 것이다. 

  아무쪼록 추정 종현께서 건강을 회복하시어, 우리의 종사에 더 많은 가르침과 이바지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2009년 3월 17일)

  

 
   
 
▒ 다음글 | 열부 연안김씨 효부 김해김씨 기행비역문
▒ 이전글 | 양도공(이천우) 중국사신행차 시말기
 
 
뼇룄怨 씤꽣꽬 議깅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