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이공 묘표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09-02-11 조회수 : 3849
 
 

사과(司果) 이공(李公) 묘표(墓表)

                   영성후인(靈城后人) 정병구(丁炳九) 지음

                                                                 종현손(從玄孫) 창헌(昌憲) 삼가 옮김


  영광(靈光)의 묘장(畝長) 땅 죽총등(竹叢嶝)1)의 경방(庚方: 西方)을 벤 방향에 있는 쌍분(雙墳) 묘소는 고(故) 부사과(副司果)2) 이공(李公)과 의인(宜人)3) 김씨(金氏)의 유해(遺骸)를 모신 곳이다.

  공의 휘(諱)는 봉신(鳳信), 자(字)는 정집(正執)이요, 관향(貫鄕)은 전주(全州)이다.

  전주 이씨는 신라 사공(司空) 휘(諱) 한(翰)으로부터 시작하여 이후로 유명한 공경대부(公卿大夫)와 뛰어난 인물이 대대로 끊이지 않았다.

  시조(始祖)로부터 20여 세(世)를 지나 조선왕조 초엽에 휘 천우(天祐)가 계시는데, 이분은 개국공신(開國功臣)4)으로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에 봉군되고 시호는 양도공(襄度公)이며, 태종(太宗)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셨으니, 세상에 널리 알려진 조상이다. 여양군(驪陽君) 굉(宏) 월성군(月城君) 명인(明仁)은 양대(兩代)에 걸쳐 봉군(封君)되었으니, 두분 다 왕실의 종친으로서 세습(世襲)하여 봉군되신 것이다5).

  충의위(忠義衛) 사맹(司猛) 휘 효상(孝常)은 처음 영광(靈光) 당산(堂山) 마을에 거주하였는데, 후손들이 이에 세거(世居)하였다. 다시 3대를 전하여 사매당(四梅堂) 응종(應鍾)은 성균관(成均館) 생원(生員)으로 선조대왕 때의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훈을 세움으로써 오산사(鰲山祠)에 배향되었다.6) 다섯 대를 지나 죽재(竹齋) 상호(相虎) 공은 손재(遜齋) 박광일(朴光一)7)과 도의(道義)의 사귐을 가졌으며, 효성으로 인해 나라에서 정려(旌閭)가 내렸고,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그분의 손자 신봉(新峰) 복원(馥遠)은 도암(陶菴) 이재(李縡)8) 선생의 문인(門人)으로 경학(經學)으로써 천거되어 정릉9)참봉(貞陵參奉)에 제수(除授)되고, 후일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승진하였으며, 영당사(影堂祠)에 배향되었으니, 공에게는 5대조가 된다.

  다음 대의 진사(進士) 수헌(守軒) 이집(以鏶)10), 휘 윤덕(潤德), 휘 문수(文秀)11), 매헌(梅軒) 심백(心白)12)은 공의 위로 4대에 걸친 조상들로 모두 문장과 학문, 행실의 도타움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분들이다.

  어머님 평택 임씨(平澤林氏)는 휘 기휴(基休)의 따님이요, 진주 정씨(晉州鄭氏)는 휘 종성(鍾成)의 따님이다.

  공은 고종(高宗) 갑술년(1874) 4월 21일에 태어나셨다.13) 어려서부터 효도하고 우애하는 마음이 남달랐고, 어버이를 섬김에는 뜻에 어긋나게 하는 일이 없이 받들어 순종하였으며, 형님을 섬김에도 사랑하고 공경함이 매우 돈독하였으므로 종족(宗族)들이 모두들 칭찬하였다.

  공은 체격(體格)이 우뚝 빼어나고, 지략(智略)과 용맹(勇猛)이 있었으며, 눈에 정기(精氣)가 밝게 빛나서 능히 남들을 놀라게 할 만하였다.

  임진년(1892)에 무과(武科)에 급제하니14), 그 때 나이 19세였다. 여러 차례 품계(品階)가 옮겨져 선무랑(宣務郞) 행(行) 부사과(副司果)에 이르렀으나, 얼마 안 있어 나랏일이 날로 잘못되었으므로 벼슬을 버리고 향리(鄕里)에 내려와 살았다.

  갑오년(1894) 동학란(東學亂) 때 비적(匪賊)들이 창궐(猖獗)하여 행패가 매우 심하였는데, 하루는 난도(亂徒) 수백 명이 동네 어귀에 들어와 재물을 약탈하였다. 공이 의연(毅然)히 앞에 나아가서 만부(萬夫)의 용맹으로 크게 소리질러 꾸짖으니 난도(亂徒)들이 스스로 퇴각하여, 한 지역이 이에 힘입어 평안하였다.

  선고(先考)인 매헌(梅軒) 공이 한동안 담양(潭陽)의 능동(陵洞)15)에 우거(寓居)하였는데, 공은 매일 문안 인사를 드리고, 저자[市場]에 가 반찬을 사다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였다. 중년 이후에는 함평(咸平)에 이사해 살았는데, 함평과 본가는 거리가 40여리나 되었는데도, 갑작스레 아버님 상(喪)을 당하여 매월 초하루․보름[朔望]에는 반드시 참석해 곡(哭)하기를 3년상 동안 한결같이 하였고, 제삿날을 당해서는 마치 부모님이 곁에 계시는 듯이 정성을 다하였는데, 노년(老年)이 되어서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향년(享年)은 79세였으니, 임진년(1952) 9월 17일에 돌아가셨다.16)

  아아. 공의 실제 행실과 훌륭한 삶의 자취를 지금까지도 전(傳)하여 칭송하는 이들이 많으나 여기에 다 기록하지 못한다.

  배위(配位)는 김해 김씨(金海金氏)로 휘 순거(順巨)의 따님이다. 임오년(1882) 3월 5일에 태어나서 기묘년 5월 15일에 돌아가셨다. 3남 1녀를 두셨으니, 아들 의필(義弼)과 김용표(金容杓), 김맹준(金孟俊), 정계채(鄭桂采)의 아내이다. 손자는 우연(友淵), 복연(福淵)과 이병모(李炳模), 이일부(李一夫), 박과복(朴果福), 이석봉, 유흥준의 아내이다.

  어느 날 공의 사손(嗣孫) 우연(友淵)17)이 나에게 묘표(墓表)의 글을 요청하였는데, 사양했으나 뜻대로 되지 못하였다. 내 일찍이 묘장서원(畝長書院)18) 원임(院任)의 한 사람으로서 공의 평생 사행(事行)의 실제(實際)를 익히 들었기에 감히 짧은 글을 지어 대략 앞의 내용으로 서술하는 바이다.

                              (05. 7. 31 번역하고 주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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