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묘(不廟)
부조묘란, 국가에 공훈(功勳)이 큰 신하의 신주(神主: 죽은 사람의 위패)를 영구히 모셔 제사드리기 위해 세운 사당(祠堂)을 일컫는다. 따라서, 신위(神位)를 부조묘에 모시는 경우는 그 인물이 역임한 관직의 고하(高下)만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후손들은 국가의 승인 하에 부조묘에 선조의 위패를 모시는 것을 가문(家門)의 커다란 영예로 여겼다.
= 부조묘에 모신 신주 =

양도공 부조묘는 종가의 대문에서 보아 경내(境內) 왼편에 위치하고 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에 전퇴(前退: 앞 툇마루)를 가진 초익공(初翼工: 건축양식의 하나. 촛가지 하나로 꾸민 공포)식의 맞배지붕이다. 외벌대의 장대석 기단(基壇)에 막돌초석(礎石)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으며, 전퇴에는 우물마루를 깔았고, 측면에는 풍판(風板: 바람과 비를 막으려고 길이로 잇대는 널빤지.)을 설치하였다.
양도공 부조묘에는 조선조 전 기간 동안 주요한 명절(名節)에는 나라에서 제수(祭需)를 보내 건국(建國) 원훈(元勳)의 공로와 업적을 기렸다. 이때마다 많은 자손들은 이곳에 함께 모여 선조(先祖)의 훌륭한 덕을 추모하면서, 옷깃을 여미고 자신을 성찰하였다. 역대 종손들은 성소(聖所)인 이곳을, 가문의 대소사를 신위(神位)에다 고하여 영령(英靈)께 가르침을 얻고 자신의 바른 행실을 다짐하는, 선조와의 소통의 장소로 여겼다.
근세의 우국지사(憂國之士)이자 명필(名筆)이었던 석촌(石村) 윤용구(尹用求)는 부조묘에 모셔진 양도공의 충혼(忠魂)과 청렴(淸廉) 의지를 추모하며 다음과 같은 주련구(柱聯句)를 남겼다. 그는 조선조 말엽 예조ㆍ이조판서를 지낸 고관(高官)이었지만, 한일합병(韓日合倂) 후에는 일왕(日王)이 주는 작위(爵位)도 거절하고 망국(亡國)의 비분(悲憤)을 오로지 서예로 쏟아냈던 인물이다.


盡忠定社日月有光(진충정사일월유광)충성 다하여 사직(社稷:국가)을 안정시키니 해와 달의
빛이 있도다.
勇冠三軍聖諭極矣(용관삼군성유극의)용맹이 삼군(三軍)의 으뜸이라 하였던 임금의 유시(諭示:
깨우쳐 보임.)가 지극하도다.
不受田民使無失德(불수전민사무실덕)토지와 노비를 받지 않으시고 <왕께서> 덕을 잃음이 없게
하였도다.
願得禽玩可知諷規(원득금완가지풍규)사냥 매 얻기를 원하시니 풍간(諷諫)의 뜻을 가히 알겠도
다.
扶正斥邪春秋大義(부정척사춘추대의)바른 것을 떠받치고 사특한 것 배척하니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로다.
謁夫子廟斯道有傳(알부자묘사도유전)공자님 사당에 참배하시어 성현의 가르침 전하게 하였도다
御賜九字遺像儼然(어사구자유상엄연)임금이 내리신 아홉 글자가 남기신 영정(影幀)에 엄연(儼
然)하도다.
享太宗廷不之典(향태종정부조지전)태종 묘정(廟庭)에 배향되고, 불천지위(不遷之位)의 은전
입으셨도다.
* 불천지위: 큰 공훈이 있어 영원히 사당에 모시도록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

= 1998 여름, 부조묘를 참배한 학술위원들이 종손 및 문중 원로들과
기념촬영을 하였다.(중앙에 종부 울산김씨와 종손 규헌 씨가
보이고, 그 옆으로 동혁 종현, 대연 종현, 종회장 용주 종현,
도유사 강연 종현, 학술위원회 회장 현구 박사 등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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