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난(欄)은 양도공의 후손 중 왕친(王親: 제왕의 친척), 효자(孝子), 충신(忠臣), 학자(學者), 과거 합격과 관직 역임자, 독립투사(獨立鬪士), 예술가로서 저명한 분을 소개한다. 차차 광범위한 조사를 통해 더 많은 분을 소개할 계획이나, 우선은 훌륭한 행적(行蹟)으로 세상의 모범이 되는 분 중 자료 근거가 분명한 경우를 일차적으로 수록하였다.
과거급제자 중 문(文)ㆍ무과(武科) 합격자를 모두 수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생원(生員)ㆍ진사과(進士科)는 합격한 분의 수효가 많아서, 여기서는 그 중 활동이 현저(顯著)했던 분 위주로 수록하였다.
또, 이미「중시조(中始祖)」,「분파조 약전(分派祖略傳)」 등에서 소개된 인물은 중복(重複)을 피하여 이름과 간단한 약력(略歷)만 기록하였다. 이분들에 대해서는 본 홈페이지 자료연구실의 「행장(行狀)」,「묘갈명(墓碣銘)」 등을 통해 더욱 상세한 행적 자료를 얻을 수 있다.
 
여양군(驪陽君) 굉(宏)
태종조 삼군도총부 좌군총제ㆍ동지돈녕부사, 고종조 증 이조판서 겸 종정경.
 
여성군(驪城君) 완(完)
태ㆍ세종조 첨지중추원사, 지돈녕부사. 고종조 증 지종정경.
 
여흥군(驪興君) 선(宣)
판서(관직 재직 연대 미상). 고종조 증 지종정경.
 
월성군(月城君) 명인(明仁)
세종조 주부ㆍ부사인, 고종조 증 호조참판 겸 종정경.
 
월평군(月坪君) 종인
세조조 원종공신, 개성유수, 고종조 증 이조판서 겸 지종정경.
 
월산군(月山君) 경인(敬仁)
단종조 계유정란 후 은일, 고종조 증 호조참판 겸 종정경.
 
월풍군(月豊君) 수인(壽仁)
성종조 돈녕부 도정, 고종조 증 형조참판 겸 종정경. 지장사 배향
 
세형(世亨: 자 형지)
중종조 성균관(成均館) 진사(進士), 청단도 찰방.
 
학(鶴: 호 쌍매헌)
진사(進士), 중종ㆍ명종조의 은일(隱逸) 명사(名士). 봉산사 배향.
 
난(蘭: 호 난헌)
중종ㆍ명종조의 은일 명사. 봉산사 배향.
 
응종(應鍾: 호 사매당)
진사(進士), 임란시 영광 수성대장. 묘장서원, 장성 오산창의사, 영광 수성사 배향.
 
황종(黃鍾: 호 만취당)
명종조 생원ㆍ진사 양과 합격, 성리학자, 기축육현, 묘장서원 배향.
 
홍종(洪鍾: 호 한천당)
효자(孝子), 임란 시 창의, 종사관, 묘장서원, 장성 오산창의사, 영광 수성사 배향.
 
극지(克持: 호 모헌)
임란시 창의, 광주의병소에 의병과 병기ㆍ군량 조달.
 
극부(克扶: 호 칠매ㆍ우헌)
진사(進士), 임란 시 창의, 장성 오산창의사, 영광 수성사 배향.
 
극양(克揚: 호 죽헌)
임란 시 창의, 장성 오산창의사, 영광 수성사 배향.
 
의령군(宜寧君) 형정(亨楨)
호는 매당(梅堂). 양도공의 증손이며, 월평군의 차남이다.
1482년(성종 13)에 승훈랑(承訓郞)을 비롯하여 병조좌랑·통정대부 도승지(都承旨: 정3품. 현재의 대통령 비서실장.)를 지냈고, 1483년(성종 14)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에 올랐다. 1872년(고종 9)에 의령군(宜寧君) 종정경(宗正卿)으로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부조묘(不廟)를 건립하고, 매년 10월 10일에 제향(祭享)하고 있다.
배위는 정부인(貞夫人) 청송 심씨로 사재(司宰) 유(瑜)의 따님이다.
단(壇)은 전남 담양군 무정면 덕곡리에 있고, 부조묘는 광양군 광양읍 죽림리에 있다.
 
광종(光鍾) [?∼? (선조조 무렵)] (의병장)
양도공의 7대손이고, 난헌 공의 2남이다. 자는 성진(聲振)이다.
정유재란(1598) 때 국가의 재정이 고갈(枯渴)되어 사태가 위급(危急)함을 듣고 군량미(軍糧米) 100여 석(石)을 변통하여 상소문과 함께 국왕이 계신 행재소(行在所)에 보냈던 바, 이를 가상히 여긴 선조대왕은 후일 공에게 특별히 별좌(別座) 벼슬을 제수(除授)하였다.
묘소는 영광군 묘량면 신천리 우리치 선산에 있다.
 
근(根) [1569(선조 2)∼1656(효종 7) (임란 의병대장)
자는 양원(陽元)이고, 호는 우봉(牛峰)이다. 양도공의 8대손이고, 청단도 찰방(靑丹道察訪) 세형(世亨)의 현손(玄孫)이며, 증 통훈대부 군자감정(軍資監正) 호승(豪升)의 아들이다.
14세 때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3년 여묘(廬墓)를 하였다. 성장하면서 경학(經學)에 잠심하였으며, 아울러 병법서인 육도(六韜)ㆍ삼략(三略)을 능히 익혀 주변의 기대를 모았다. 광주에 거주하면서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중봉(重峯) 조헌(趙憲)을 뵙게 되었는데, 그들은 공의 재주를 아껴 매우 애중히 여겼다.
24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분(忠憤)을 못 이겨 장성(長城) 남문창의(南門倡義)에 참가, 의병장 김경수(金景壽)를 보좌하여 선봉에 서서 결사적으로 싸웠다. 안성(安城)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이름을 떨쳤고, 고경명ㆍ조헌이 패배하여 전사한 뒤에는 소사(素沙)ㆍ직산(稷山) 등지의 전투에 참전하여 많은 왜적을 섬멸하였다. 이때의 공의 활약에 대해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극구 칭찬하였고, 조정에서는 사과(司果) 벼슬을 내려 격려했다.
이듬해 공은 김극순(金克純), 김인혼(金麟渾) 등 여러 의사(義士)들과 더불어 복수장(復讐將) 고종후(高從厚, 1554~1593)를 따라 진주성에 가서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天鎰)과 함께 죽기로 서로 약속하고 성을 지켰다. 처절한 전투 끝에 성이 함락되어 의병장 대부분이 전사(戰死)한 가운데, 시급한 군량미 조달을 위해 법성포로 잠시 나왔다가 목숨을 건진 공은 이 때 함께 순국(殉國)하지 못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겼다.
영조조에 조정에서는 공에게 장예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를 추증하였고, 후세의 사림(士林)들은 공의 충절(忠節)을 기려 경현사(景賢祠)와 오산창의사(鰲山倡義祠)에 모셨다.
묘소는 광주시 석곡면 소룡동에 있다. 「묘갈명」을 교리(校理) 고성진(高性鎭)이 찬술했다.
 
극수(克授) [1570(선조 3)∼1597(선조 29)] (임진왜란 의병장)
양도공의 7대손이며, 만취당 황종(黃鍾)의 2남이다. 자는 여중(余重), 호는 모재(慕齋)이다. 최영경(崔永慶)의 문인이다. 충의위(忠義衛)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 23세의 나이로 대장군관(大將軍官)이 되어 영광 수성대장(守城大將)인 백부(伯父) 사매당을 보좌했으며, 정유재란(1597) 때는 사재(私財)를 기울여 군량미를 조성한 뒤 의사(義士)들을 이끌고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막하에 달려가 왜적 섬멸을 도왔다. 불행히 그 곳 수영(水營)에서 병에 걸려 위독하게 되자 통곡하고 북향사배(北向四拜)한 후 운명(殞命)하였다. 영광 수성사에 모셔졌다.(『절의록(節義錄』과 『영광수성록(靈光守城錄)』 참조.)
 
극람(克攬, 1582∼1643)ㆍ극찬(克瓚, 1585∼1643) (義士, 이괄 난 창의)
난헌 공의 장남 부호군(副護軍) 경종(景鍾)의 2남 반매당(伴梅堂) 극람(克攬)과 3남 극찬(克撰)은 광해군 당시의 폐모론(廢母論)에 죽음을 무릅쓰고 극렬히 반발(反撥)하여 의로운 명성을 떨쳤다. 이로 인해 두 분은, 흉당(凶黨)들의 가해(加害)를 피해 영광 홍농(弘農)의 산속에 숨어살기까지 해야 했다. 인조반정 후에 귀향한 두 분은 얼마 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의분(義憤)을 참지 못하여 동지(同志)인 참봉(參奉) 신응순(辛應純), 진사(進士) 신유일(辛惟一) 등과 의병(義兵)ㆍ 의곡(義穀)을 모아 행재소에 보냈다. 두 분은 양도공의 7대손이다.
 
해(垓) [1585(선조 18~ ? )] (우국지사, 효자)
양도공의 8대손으로, 의병장 사매당 응종의 손자이며, 주부 공 극지(克持)의 장남이다. 자는 회보(恢甫), 호는 석와(石窩) 또는 석와거사(石窩居士)이다.
천품이 고매하고 영특하며, 효성과 우애가 극진하여 칭송을 받았다. 약관(弱冠)에 이미 경사(經史)에 능통하고 필법(筆法)이 웅건(雄健)하였다. 28세 때인 광해 4년(1612)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본디 강개로운 성품을 지니었기에 국가를 위해 자신의 경륜을 펼치고자 하였으나, 성균관에서 수학하던 중 어지럽게 소용돌이치는 정국(政局)을 보면서 입신출세(立身出世)의 길을 단념하고 귀향하였으며, 이후 오직 부모님을 극진히 받들면서 강학(講學)에 전념하였다. 부모상을 당해서는 슬퍼함이 지나쳐 몸을 상할 정도였으며, 비바람이나 혹한(酷寒)에도 불구하고 성묘(省墓)를 극진히 하였다.
묘소는 영광군 대마면 송죽리 화산의 마명당에 모셔져 있다.
 
극림(克霖)의 배위 흥양 노씨 [1595(선조 28)∼1611(광해군 3)] (열부)
극림(克霖 [1594(선조 27)∼1609(광해군 1)])은 자가 명부(明夫)인데, 양도공의 7대손이며, 광종(光鍾)의 2남이다. 공은 불행히 16세의 나이에 요서(夭逝)하였다.
공의 배위 흥양 노씨(興陽魯氏)는 광직(光直)의 따님으로, 어린 나이에 시집왔음에도 부덕(婦德)이 높았다. 정숙(貞淑)하고 부군(夫君)을 잘 섬겨 널리 칭송을 받았으며, 유산(遺産)이 없어 집안이 가난했으므로 열심히 밭 매고 길쌈하여 살림을 일으키려 애를 썼다.
부군이 병이 들어 위독해지자 부인은 허벅지의 살을 베고 손가락을 베어 부군의 입에 흘려 넣었으나 부군은 회생(回生)한 지 사흘 만에 결국 세상을 떴다. 이에 부인이 따라서 죽고자 하였으나 뱃속의 7개월 된 아이를 생각하여 단념하였다. 부인은 아들을 낳아 양육하며 부군(夫君)의 3년상을 극진히 치르고 난 뒤, 상(喪)을 마치는 바로 그 날 목숨을 끊었다. 전남 영광군 군서면(郡西面) 방고치(方古峙)에 있는 부군의 묘 아래에 부인의 묘소를 조성했는데, 이 때 갑자기 그 봉분 옆에 두 개의 죽순(竹筍)이 돋아났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생각하였다고 한다.
부인의 정렬(貞烈)이 보고되자, 인조(仁祖)가 특명으로 열녀(烈女)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니, 근래까지도 그 정려(旌閭)가 방고치의 큰길가에 있었다고 한다. 종(從) 7대손이자 양도공(襄度公)의 14대 종손인 진사 매죽헌 이석(以錫)이 부인의 「정려기(旌閭記)」를 찬술하였고, 8대손 윤형(潤馨)이 『영광군지』를 인용하여 부인의 행록(行錄)을 상세히 서술한 바 있다.
 
성() [1594(선조 27)∼1653(효종 4)] (청백리ㆍ善政)

양도공의 8대손으로, 의병장 응종의 손자이며, 왕자 사부 극부(克扶)의 3남이다. 자는 화봉(華封), 호는 매헌(梅軒)이다. 아버지로부터 가학(家學)을 전수받았고, 18세 때 향시(鄕試) 양장(兩場)에 합격하여 문장(文章)으로 이름이 났다.
1635년(인조 13) 증광시(增廣試)에 갑과(甲科) 탐화랑(探花郞)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교예(敎隸)에 임명되고 1637년(인조 15) 승정원(承政院) 주서(注書)가 되었다.
1639년(인조 17) 연서도찰방(延曙道察訪)·함경도 도사(都事), 1645년(인조 17) 병조·형조의 좌랑(佐郞)ㆍ정랑(正郞), 1647년(인조 25) 울진현령(蔚珍縣令)을 역임하였다. 1648년(인조 26)에는 동차하정사(冬差賀正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이어 홍문관 교리(校理)·이조정랑을 지낸 뒤 1649년(인조 27) 청도군수(淸道郡守) ㆍ통례원(通禮院) 우통례(右通禮)에 임명되었다. 특히 청도군수 재직시 청백한 생활과 선정(善政)으로 칭송이 높았다. 그 뒤 여러 번 출사(出仕)를 요청받았지만 모두 물리치고 독서와 시(詩)를 즐기며 지냈다.
저서에 『매헌유고(梅軒遺稿)』와 『연행일기(燕行日記)』가 있다. 
묘소는 전남 영광군 묘량면 덕흥리 소재 응봉산에 있는데, 병조판서 원경하(元景夏)가 공의 「묘갈명(墓碣銘)」을 썼다. 다음에, 경상도 청도군 관아 뜰에 세워졌던 공의 선정비(善政碑)를 국역(國譯)해 붙여둔다.

군수(郡守) 이공(李公)의 청백선정유애비명(淸白善政遺愛碑銘) 병서(幷序)

완산(完山) 이공(李公) 성(城)의 자는 화봉(華封)이며, 영광(靈光)에 살며 세족(世族)이 되었다.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청반(淸班)을 두루 역임하니 사대부(士大夫)들이 그 이름을 추앙했다.
기축년(1649)에 군수(郡守)가 되어 관직(官職)에 있으면서 직무를 수행하기를 지극히 공평하고 지극히 명백하게 했다. 군대(軍隊)를 어루만지고, 백성을 구휼(救恤)하기를 인(仁)과 덕(德)으로써 하였다. 무릇 공물(貢物)과 부세(賦稅)가 있을 때는 응당히 관탕(官帑: 관청 창고, 금고)의 것으로 했고, 사안(事案)에 따라 그것들을 줄이고 덜어주었으며, 집집에 요역(遙役)을 정하지 않았다.
부임한 지 3년 동안에 교화(敎化)가 행해지고, 혜택(惠澤)이 흡족했으며, 실낱만큼, 터럭만큼도 공물(公物)을 가까이 하지 않으니 빙옥(氷玉)처럼 투명했다. 자신의 몸을 보양(保養)하는 데는 매우 박(薄)하게 하여 마치 빈한(貧寒)한 선비와도 같았다. 항상 말하기를, “내 마음을 부끄럽게 할 수는 없다.” 고 했으니, 그 마음가짐의 청백(淸白)함이 이와 같았다.
공경(恭敬)으로써 일에 임하고, 재판(裁判)의 판단을 신중히 하니 아전(衙前)이 감히 속이지 못했고, 백성은 <사실을> 밝히지 못해서 원망하는 일이 없었다. 쇠잔(衰殘)해진 것을 소생케 하고 폐단(弊端)들을 다 제거하니, 온 경내가 두루 평안하게 되었다. 대개 이는 인위적(人爲的)으로 된 것이 아니고, 자연스럽게 치화(治化)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신묘년(1651)에 재해(災害) 때문에 파직(罷職)이 되었지만, 이는 그의 허물이 아니었다. 아! 군자(君子)가 세상을 행하자면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이 곳 백성들 중 어린이 늙은이 할 것 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갓난아이가 어머니를 잃은 격이니 어떻게 살 것인가?” 라고 했으며 원근(遠近)에서 듣고 탄식하며 애석(哀惜)해 하기를 마지않았다.
떠나는 날에는 다만 옛 책상자만 메고 갔으며, 도중에 그의 종들에게 사들고 있는 것을 물어 다 불태워버렸다. 이를 보고 들은 자가 모두 놀라고 탄복(歎服)했다. 읍인(邑人)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우리 사또 같은 분을 어찌 쉽게 만날 수 있겠는가? 어찌 감히 잊을 수 있겠는가? 그 덕은 기록할 만한 것이다.” 했다.
드디어 명(銘)을 새긴다. 맑고 밝고 순수하고 바름이 그 성품의 바탕이라. 안으로 정직(正直)하고, 밖으로는 온화(溫和)하였다. 얼음처럼 맑았고, 옥처럼 깨끗하였다. 혜택(惠澤)이 어떠했던가. 봄바람에 사물(事物)이 생동하듯 하였다. 어짊과 사랑이 미침이 살과 뼛속에까지 스며들었다. 이 굳은 옥돌에 새겨 백세(百歲)토록 없어지지 않게 하노라.
고을 사람 종사랑(從士郞) 전(前) 참봉(參奉) 이중경(李重慶)은 짓고, 유학(幼學) 곽홍습(郭鴻習)은 쓰고, 유학 곽홍한(郭鴻翰)ㆍ박동정(朴東貞)은 감조(監造)한다. 1661년 12월 일 세우다.

 
형익(亨益) [1604(선조 37)∼1687 (숙종 13)] (은일, 학자)

양도공의 9대손이고, 사매당 응종의 증손자이며, 부사직(副司直) 탄(坦)의 2남이다.
자는 계중(季重)이요, 호는 복초재(復初齋)이다. 성품이 본디 강직하고, 번잡하고 화려한 것을 싫어하였으며,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며 학문 연마하기를 좋아하였다. 명망(名望)이 높아지자 호남의 선비들 중 문하(門下)에 모여들어 가르침을 받는 이들이 많았다.
숙종 10년(1684)에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진하여 용양위(龍衛) 부호군(副護軍)을 지냈으며, 장열왕후(壯烈王后)가 회갑을 맞은 다음해에는 은일(隱逸) 명사(名士)로서 특별히 우대를 받아 조정으로부터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제수되었다.
세상을 뜨자, 50여 명의 문인(門人)들이 상복(喪服)을 입고 장례를 엄숙히 거행하였다고 한다. 묘소는 영광 군서면 남부 갑좌(甲坐)에 있다. 6대손 증 예조참판 윤우(潤雨)가 지은 「신도비문(神道碑文)」이 전한다.
공이 일찍이 가훈(家訓)을 지어 병풍에 적어 자손을 깨우쳤는데, 그 병명(屛銘: 병풍에 쓴 銘文.)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며, 이는 한학자 변시연(邊時淵)의 역저(力著) 『문원(文苑)』 13권(下의 8쪽)에도 거두어져 있다.

병 명(屛銘)
우리 선조께서 서울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담양을 거쳐 영광에 이르러 터전을 잡아 처음 역사를 여시고, 좋은 땅에 편안히 거처하여, 대대로 청전(靑氈: 집안의 보물)을 지켜 이어 내려오며, 자손(子孫)이 번창하였도다.
정착(定着)하여 안도(安堵)한 지 거의 백여 년을 지내어 수(壽)와 덕(德)이 겸비하니, 여남(汝南)의 여러 현인(賢人)들과 같았도다.
불초 잔약(孱弱: 아주 약함.)한 후손이 전려(田廬: 시골의 집)를 보전하고 지켰으되, 산업에 힘쓰지 아니하여 집안에 저축은 없으나 처세(處世)를 옹용(雍容: 온화하고 조용함.)히 하여 헐뜯음과 기림이 다 같이 없고, 풍색(風色: 남 보기에 좋지 못한 기색.)을 싫어하고 피하니 속객(俗客)이 오는 일이 뜸하도다. 분수(分數)를 지켜 노경(老境)을 보내니 팔십의 지팡이 짚은 늙은이로다.
늦게야 아들을 얻어, 세 손자가 모두 장성(長成)하여 형제가 서로 화목함을 보니 한 집안의 이 같은 경사(慶事)를 어찌 이루 다 말하리오. 문장(文章)은 여사(餘事)이니, 각자 학업에 부지런하며 조심하고 몸을 바르게 하는 것이 너희들의 직분이니라. 덧없는 영화(榮華)가 갑자기 다가옴은 그 뒤를 미리 헤아릴 길 없는 것이니라.
아! 나의 세 손자들이여, 너희들은 소홀(疎忽)히 여기지 말고 여기에 마음을 두고, 이로써 경계(警戒)를 삼을 지어다. 기운이 피로(疲勞)한데 뜻은 길어 마침내 일일이 다 말하지 못하노라.
계해년(1683) 가을 7월 16일, 나의 나이 바야흐로 팔십인데, 이 경계(警戒)의 글을 지어 둘째 손자 여룡(如龍: 相龍)에게 명하여 병풍(屛風)에 쓰게 하노라.
[惟我先祖 自京南來 潭抵靈卜地樂土安居 世守靑氈 繼繼承承 瓜綿綿 奠枕安堵 幾經百年
[유아선조 자경남래 걸담저령 복지창개 낙토안거 세수청전 계계승승 과질면면 전침안도 기경백년
壽德兼備 汝南諸賢 不肖孱孫 保守田廬 不謀産業 家無儲 處世雍容 無毁無譽 惡避風色 俗客來疏
수덕겸비 여남제현 불초잔손 보수전려 불모산업 가무영저 처세옹용 무훼무예 오피풍색 속객래소
安分送老 八十杖夫 晩得一子 及見三孫 皆爲長成 能和塤 一庭之內 此慶何言 詞章餘事 各自勤業
안분송로 팔십장부 만득일자 급견삼손 개위장성 능화호훈 일정지내 차경하언 사장여사 각자근업
操心正身 時汝之職 浮榮來 預不可測 嗟我三孫 汝則毋忽 念念在慈 以此爲誡 氣憊意長 終不一一
조심정신 시여지직 부영당래 예불가측 차아삼손 여칙무홀 염염재자 이차위계 기비의장 종불일일
癸亥秋七月旣望 余年方八十 述此誡 命次孫如龍 書于屛]
계해추칠월기망 여년방팔십 술차계 명차손여룡 서우병]

 
상호(相虎) [1662(현종 3)∼1718(숙종 44)] (효자ㆍ정려)
자(字)는 문경(文卿), 호는 죽재(竹齋)이다. 양도공의 11대손이며, 사매당(四梅堂) 응종(應鍾)의 5대손이다.
어려서부터 지극히 착한 성품을 지니어 부모님을 섬김에 사랑과 공경을 다하였고, 점차 자라면서 부단히 효성(孝誠)을 더해갔으며, 받들어 모심에 극진한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어머니의 상(喪)을 당해서는 울음이 입에서 끊기지 않았고, 한 시도 상복(喪服)을 몸에서 떼지 않았으며, 죽[粥]으로써 상기(喪期)를 마쳤다. 하루에 두 번 묘소에 가서 곡(哭)하였는데, 추위나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몸이 몹시 상(傷)하여 병에 걸려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이 되었는데도 오히려 아침ㆍ저녁 제사를 올렸는데, 모름지기 엎드릴 때에는 남의 부축을 받아야 할 처지인데도 제사를 마친 후에야 그만두었다. 제사드리고 추모하는 일에는 더욱 삼가서 비록 한겨울이라도 반드시 목욕(沐浴) 재계(齋戒)하고 경건히 별실(別室)에 거처하였으며, 몸소 음식을 갖추되 오직 정성을 다하였다.
숙종조 경인년(1710)에 순무사(巡撫使) 권상유(權尙游)가 공의 이 같은 지극한 효행을 조정에 아뢰었던 바, 왕이 명하여 복호(復戶)를 내리고 쌀을 하사하였으며, 집에 정표(旌表: 즉, 효자 정문.)를 세웠다. 복호는, 조선왕조 때 충신, 효자, 열부가 난 집에 요역(役)ㆍ전세(田稅) 이외의 잡부금을 면세해 주던 일을 말한다. 정표는, 사람의 선행(善行)을 칭송하고 이를 세상에 드러내어 널리 알리는 표시판인 바, ‘효자이상호지문(孝子李相虎之門)’이라 새겨진 숙종조의 정표는 지금도 영광군 묘량면 영양리 당산 종가의 대문 위에 걸려 있다.
사후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다. 이조판서 송덕상(宋德相)이 공의 「묘갈명」을 지었으며, 당대 저명 학자로 당시 영광군수였던 유최기(兪基)가 「죽재이공정려기(竹齋李公旌閭記)」를 지어 공을 추모했다. 「정려기」는 10대손 동혁(東奕) 씨에 의해 국역(國譯)되어 종가 앞에 와석비(臥石碑)로 세워졌다.
 
복원(馥遠) [1720( 숙종)∼1794(정조 18 )] (은일, 성리학자)

자는 군열(君烈), 호는 신봉(新峰)이다. 양도공의 13대손으로, 아버지는 증 호조참판(戶曹參判) 인훈(仁薰)이고, 할아버지는 증 좌승지(左承旨) 상호(相虎)이다.
어릴 때 아버님을 여의고 어머니 정부인(貞夫人) 나주 오씨(羅州吳氏)의 엄한 훈도(訓導)를 받으며 성장하였다. 모친에 대한 효성이 극진하였을 뿐만 아니라, 형님 필원(馝遠)과의 우애가 두터워 평생 분가(分家)하지 않고 한 집에서 기거하였다. 총명(聰明)함이 남달라서 소시(少時)부터 인근의 촉망하는 바가 컸으며, 절차탁마(切磋琢磨: 학문과 덕행의 닦음의 비유) 끝에 성리학자로서 큰 명성을 얻었다.
정조대왕(正祖大王)이 등극한 직후, 경학(經學)에 뛰어나고 행실이 방정(方正)한 선비를 천거하라는 왕명을 받들어, 조정이 공을 천거하였다. 왕이 곧바로 정릉 참봉(靖陵參奉)을 제수(除授)하니(1777), 공이 누차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부임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을 칭탁하며 그만두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공을 대우하여 정조 14년(1790)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계급을 올렸고, 정조 18년(1794)에는 또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의 벼슬을 내렸다.[이상 정조조의 『일성록(日省錄)』『어정인서록(御定人瑞錄)』 참조.]
입신양명(立身揚名)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수양과 학문에 전념했던 공은, 당산(堂山) 향리 뒷산에 신봉정사(新峰精舍)를 지어 독서ㆍ연구하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문하생 중에는 문과에 급제한 아드님 윤성(潤聖), 진사ㆍ생원 양과에 급제한 장조카 이석(以錫), 족제(族弟:친척아우) 경석(敬錫), 강주영(姜柱榮), 효행과 학문이 뛰어났던 족제(族弟:친척아우) 건원(建遠) 등이 있다.
서거 후, 공은 순조조에 전라도 지역을 순회하던 어사 유성환(兪星煥)의 장계(狀啓)에 의해 이재(齋) 황윤석(黃胤錫)ㆍ존재(存齋) 위백규(魏伯圭)와 더불어 포상(褒賞)이 청해지기도 하였다.[위백규의 『존재집(存齋集)』 참조.] 또, 문인(門人)과 호남의 사림(士林)들은 공의 영정(影幀)과 위패(位牌)를 영당사(影堂祠: 지금의 묘장서원)에 모시어, 춘추(春秋)로 제사 드리며 맑고 높은 덕을 기렸다. (『묘장서원지』 참조.)

 
종열(宗烈) [1739(영조 15)∼1817(순조 17)] (문과, 善政)

자는 영숙(永叔), 호는 소헌(疏軒). 양도공의 13대손으로, 청단도 찰방(靑丹道 察訪) 세형(世亨)의 9대손이고, 설(楔)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경전(經典)에 능통하고 시(詩)를 잘 지어 수재(秀才)로 이름났으며, 부모의 상을 당해 6년을 매일 성묘하여 효자의 일컬음을 들었다.
1774년(영조 50)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1786년(정조 10)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관직을 시작하여 1802년(순조 2)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이조정랑(吏曹正郞), 1814년(순조 14)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우주정화(宇宙精華)』, 『구주산천집설(九州山川集說)』, 『동국산수기(東國山水記)』 『수기록(搜奇錄)』, 『황명명신집록(皇明名臣輯錄)』, 『동야문견설(東野聞見說)』 등이 있었으나 전쟁을 겪으며 없어져,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서거(逝去) 후 전남 영광군 군남면 소재 육왕사(六旺祠)에 모셔졌으며, 유물(遺物)로 영정(影幀)이 있다. 공의 행장(行狀)을 성리학자로 헌종 때 형조판서를 지낸 송치규(宋穉圭, 1759~1838)가 찬술하였다.

 
경석(敬錫)[1744(영조 20)∼1800(정조 24)] (효자, 은일 학자)
양도공의 13대손이고, 한천당의 7대손이며, 시걸(時杰)의 아들이다. 자(字)는 여관(汝寬), 호(號)는 복성헌(復性軒)이다.
성품과 도량(度量)이 너그러웠으며, 부모님에 대한 지극한 효성(孝誠)으로 칭찬을 받았다. 어버이의 병환이 위독(危篤)해지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어 약(藥)에 섞었으며, 정성을 다해 하늘에 기도(祈禱)하였다.
어린 나이부터 족형(族兄)인 신봉 공(新峰公) 문하(門下)에서 수업하여 문예(文藝)가 일찍 이루어졌다. 성리학(性理學)에 마음을 쏟아 일가(一家)를 이루었는데, 호를 복성헌(復性軒)이라 한 것만 보아도 자신의 순수(純粹) 지선(至善)한 성(性)을 회복하고자 하는 신념과 의지가 어떠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영조(英祖) 50년 갑오년(1774)에 실시된 증광시(增廣試)에 진사(進士) 3등(三等)으로 합격하였으며, 성균관에서 수학하며 이름이 높이 드러났다. 재주와 행실, 학문으로 두 번이나 조정(朝廷)의 관직 추천(推薦) 명단에 든 바 있었으나, 벼슬에는 뜻이 없었으며, 오직 학문과 수양을 목표로 정진하였다. 지기(知己) 가운데 조선후기 유명한 음악가였던 운소(雲巢) 이영유(李英裕: 社稷署令, 통훈대부 行 江華島 經歷 역임. 양도공 유물 「이응도찬(二鷹圖贊)」의 지은이.)가 시로써 칭송하였듯이, 일생을 선행(善行)과 고아(高雅)한 음악(音樂)의 완상(琓賞: 즐겨구경함)으로 가꾸었던 큰 선비였다.(이상 『사마방목(司馬榜目)』, 『운소만고(雲巢漫藁) 』, 『양도공파 정미보(1847)』 등 참조.)
 
윤성(潤聖) [1765(영조 41)∼1831(순조 31)] (문과, 善政, 성리학자)
자는 맹희(孟希), 호는 칠우(七迂)이다. 양도공의 15대손이며, 신봉 복원(馥遠)의 장손(長孫)이고, 진사(進士) 이집(以鏶)의 아들이다.
영특한 자질과 인품으로 기정진(奇正鎭: 장성 출신으로 성리학 6대가로 불림.) 등 당대 유현(儒賢)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중년(中年)에 장성 동쪽에 정사(精舍)를 짓고 강학(講學)에 전념하였다. 공의 학행(學行)이 인정되어 1822년(순조 22) 전라감사 이서구(李書九)는 `박학역행인 숙유(博學力行人 宿儒)'라 칭하며 조정에 천거한 바 있다.
1827년(순조 27) 뒤늦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주부(主簿)·감찰(監察)·지평(持平)을 역임하고, 1829년(순조 29) 정3품으로서 태천군수(泰川郡守)로 부임하여 오교(五敎: 다섯가지 가르침. 즉, 충ㆍ효ㆍ의ㆍ용ㆍ인)를 선양하고 흥학(興學)한 공적이 뛰어나 관찰사 김학순(金學淳)에 의하여 조정에 포상을 청하는 보고가 올려졌다. 또한 청백(淸白)과 애민(愛民)으로 백성을 다스려 1831년 공이 별세하자 이민(吏民: 고을 아전들과 백성)이 공을 애모하여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평소 이기설(理氣說)과 주역(周易)을 깊이 연구하였고 홍석주(洪奭周)·김조순(金祖淳)·조인영(趙寅永) 등과 교분이 깊었으며 성리학(性理學)에 대해 많은 논의를 한 것이 문집(文集) 및 100여 통의 간찰(簡札: 편지)에 나타나 있다.
 문집(文集)으로 『칠우집(七迂集)』이 있고, 유물(遺物)로는 명사(名士)와 교유한 간찰(簡札) 등이 있다.
 
윤수(潤壽) [1802(순조 2)∼1871(고종 8)] (문과, 善政, 충간공)
자는 치오(致五), 호는 오소(吾巢). 양도공의 15대손이고, 취옹 공의 8대손이며, 증 참판(參判) 이박(以搏)의 아들이다.
향리(鄕里)에서 학문을 연마하던 중 뒤늦게 1865년(고종 2)에 64세의 나이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병조참지(兵曹參知)로 재직 중 1866년(고종 3)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치밀한 작전 계획을 세워 큰 공을 세웠다. 당시 섭정(攝政)하던 흥선대원군이 특히 공을 지우(知遇)하였으며, `호남 제일재상'이라고 칭송한 바 있다.
1868년(고종 5) 가선대부(嘉善大夫) 형조참판(刑曹參判) 종정경과 경연특진관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지냈다. 시호(諡號)는 충간(忠簡)이다.
묘소는 전북 남원시 동면 상우리 산 8번지에 있다. 공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성리학자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 찬술하였다.
철종(哲宗) 5년 갑인년(1854) 담양 홍암 선산의 명산재(明山齋)를 중건할 때 공이 쓴 「상량문(上樑文)」이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심백(心白) [1835(헌종 1)∼1910(융희 4)] (우국지사, 순국)
자는 일여(一如), 호는 매헌(梅軒)이다. 양도공의 17대손이며, 정조조의 경학현량지사(經學賢良之士) 신봉(新峰) 복원(馥遠)의 현손(玄孫)이다. 소시부터 전국 8장사로 일컬어질 만큼 용력(勇力)이 뛰어나 많은 일화(逸話)를 남겼다. 재예(才藝)와 문필(文筆)도 함께 뛰어나 고종(高宗) 초엽(임신년, 고종 9년)에 조정에 천거된 바 있으며, 당시 집정(執政)하던 흥선대원군의 지우(知遇)를 입었으나 출사(出仕)하지 않고 하향(下鄕)하여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하였다. 1902년에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가 되었다. 담양 홍암 능동 정부인(貞夫人) 산소의 석물(石物) 공사, 명산재(明山齋) 중건(重建), 고양군 양도공 신도비(神道碑) 건립 등의 큰 종사를 주도하였으며, 서예(書藝)에도 뛰어나 양도공 신도비의 두전(頭篆)을 썼다. 경술국치(1910. 8. 29)를 당하자 비분(悲憤)을 참지 못해 상심(傷心)하다가 이로부터 와병(臥病)하였으며, 곡기(穀氣)를 삼키지 못하고 인삼즙 등으로 연명(延命)하다가 3개월여 만에 졸(卒)하였다. 담양군 용암리 홍암 능동 선영 내에 묘소가 있다.
 
기백(基白) [1856(철종 7)∼1907(광무 11)] (구한말 의병장)
자는 사유(司維), 호는 지은당(芝隱堂)이며, 이름을 사유(士有)·안사유(安士有)·지백(之白)으로도 불렀다. 양도공의 17대손이며, 병절교위 공의 14대손이다. 아버지는 증 통정대부 문발(文發)이다. 전남 장성군 삼계면 좌초리에서 출생하였다.
공은 좌초리 서재에서 한문(漢文)과 병서(兵書)를 수학하고 그 서재의 중심인물이 되어 훈육에 힘쓰던 중 1881년에는 기우만(奇宇萬) 등과 함께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에 참여하였다.
1898년에는 당질(堂姪)인 화삼(化三)을 도와 탐학(貪虐)이 극심한 흥덕군수 박용현(朴鏞炫)을 축출하고 옥고(獄苦)를 치렀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고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니, 공은 봉기하여 화삼 및 학당 출신 제자들과 함께 250여 명의 의병부대를 편성하였다. 자신이 맹주(盟主)가 되고 화삼을 총대장으로 하여 장성·발산·고성산·만화동·반월 등의 전투에서 왜적을 무찌르다가 마침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이 「근고팔도사민서(謹告八道士民書)」를 보내왔으므로 능주 쌍봉사에서 합류하였다.
이번에는 최익현을 맹주(盟主)로 하여 이백래(李白來)·양회일(梁會一)·백홍인(白弘寅)·심남일(沈南一)·임창모(林昌模)·전해산(全海山) 등 50여 의병장과 함께 능주·화순·동복을 완전히 탈환하였으나, 1907년 4월 24일 광주를 탈환코자 진군하던 중 광주와 동복 사이에서 왜군 복병대(伏兵隊)에 의하여 피습, 패전하였다. 이 때 의병장(義兵將) 1명은 순국하고, 6명은 붙잡혀 유배되었으며 20여 명은 부상이 심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왜적과의 정면 대전(對戰)이 불가하게 되자 공은 유격전을 기도(企圖)하여, 장성·영광·흥덕·담양 지역의 의군(義軍) 책임자로서 새로이 격문(檄文)을 포고하고 의병진을 재정비하였다. 이어, 1907년 2월 삼북지서 습격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전투를 100여 회나 계속하였으며, 결국 고산 전투에서 많은 의사들과 함께 순국(殉國)하였다.
 
화삼(化三) [1866(고종 3)∼1910(융희 4)] (구한말 의병장)
양도공의 18대손이고, 병절교위 공의 15대손이며, 증 통정대부 지백(智白)의 장남이다. 초명은 영신(永信)·영환(永煥)으로, 전남 장성군 삼계면 좌초리에서 출생하였다.
1898년 12월 27일 영학당(靈學黨) 당수(黨首)로서, 탐학이 극심한 흥덕군수 박용현(朴鏞炫)을 농민 300여 명과 당숙(堂叔)인 사유(司維, 일명 基白)의 지원 아래 축출하고 동월 30일 광주 관찰부 순검대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고 통감부가 설치되니 각처에서 봉기, 창의(倡義)할 때 총대장이 되어 동년 10월 장성에서 일군(日軍)을 격파하는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일본군에 비하여 병기와 훈련이 부족하였으므로 100여 명의 부대를 인솔하고 석태산으로 들어가 병기(兵器)를 주조하고 병사를 훈련하며 전력(戰力)을 재정비하였다. 때마침 면암 최익현의 「근고팔도사민서(謹告八道士民書)」를 받고 즉시 능주 쌍봉사로 가서 호남 의병진에 참여하여 최익현을 맹주로 하고 제6로군에 소속되어 6로군의 관하 장성·영광·흥덕·담양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4월 18일 무장 고산 전(戰)을 위시하여, 5월 8일 불갑산 전, 9월 12일 고창 석곡 전, 10월 20일 영광 백수 전, 10월 27일 불갑산 전(戰), 11월 4일 무장 장사산 전 등 수십 차례의 전투에서 승전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이대극(李大克 )부대와도 합류하여 연합 전투를 하였으며, 1909년 4월 3일 이대극 대장이 순국하고, 족숙(族叔)인 사유대장도 순국하자 공은 이 부대를 이끄는 의병장이 되었다. 이 때 대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헌병부대가 9∼10월에 걸쳐 전남지역 토벌작전을 벌여 남도출신 103명의 의병이 순절(殉節)하였다. 이에 공은 고군분투하다가 1910년 1월 28일 고성산 전투에서 순국(殉國)하였다.
1986년 국가에서는 공에게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추서(追敍)하였다. 1987년에는 영광 향교가 주관하고 영광 각 사회단체가 후원하여 영광읍내 공원에 공의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공의 묘소는 전남 장성군 삼계면 자초리 고성산 아래 대동(大洞) 자좌(子坐)에 있다.
 
현승(鉉昇) [1873(고종 10∼해방 후 ? )] (선정 목민관)
양도공의 19대손이고, 사매당의 13대손이다. 할아버지 경섭(京燮)은 성균관(成均館) 진사(進士)이고, 아버지 명로(明老)는 통정대부 내부(內部) 참서관(參書官)을 지낸 후 1906년 가선대부가 되었다. 어머니 울산 김씨는 하서 김인후의 후손이다.
공의 자(字)는 정삼(鼎三)이다. 전북 고창군 부안면(富安面) 하오산(下鰲山)에서 태어났으며, 유년시절부터 부모에게 효성스럽고, 선조(先祖)를 위하는 마음이 남달랐다.
광무 2년(1898) 종친부 참봉(參奉)으로 처음 벼슬길에 올라 이듬해 6품으로 승진하였으며, 광무 6년(1902)에는 외부 참서관에 올랐고, 정3품 통정대부로서 전라북도 금구군수(金溝郡守)를 역임하였다.
1903년 흉년으로 인해 굶주리는 주민(住民)들이 많아지자 공이 과감히 창고를 열어 생계(生計)가 어려운 많은 백성들을 구휼(救恤)하였다. 이에 군민(郡民)들이 그 은덕(恩德)을 기리는 포덕비(布德碑)를 금구향교(金溝鄕校) 앞에 세웠다. 「군수 이후 현승 포덕비(郡守李侯鉉昇布德碑)」라 제(題)한 비문의 전문(全文)은 다음과 같다.
"후하만야 호포견감 박황손름 백호함송 계묘칠월 일[侯何晩也 戶布減 薄 百戶咸頌 癸卯七月 日]"
"군수께서는 어찌 그리 더디 오셨는가. 호포(戶布)를 경감해 주시고, 박봉(薄俸)에도 창고를 열어 구휼하시니, 많은 백성들이 다함께 덕(德)을 기리는 바이다. 계묘 7월 일"
2008년 6월 19일부터~8월 10일까지 전북 전주(全州)에서 열린 <전라감영 특별전>에서는, 1902년에 전라도 관찰사 조한국이 금구군수인 공에게 발송한 훈령(訓令)이 기록된 고문서(古文書)가 전시된 바 있다.
 
봉신(鳳信) [1874(고종 11∼1952] (무과, 효자)
양도공의 18대손이고, 통정대부 심백(心白)의 2남이다. 자(字)는 정집(正執)이다. 전남 장성군 장성읍 안평리에서 태어났다. 소시부터 아버님 매헌(梅軒) 공에 대한 효성이 지극해서 인근에 널리 알려졌다. 고종 29년(1892)에 무과(武科)에 급제하니(병과 17위 합격), 그 때 나이 19세였다. 관직이 선무랑(宣務郞) 행(行) 부사과(副司果)에 이르렀으나, 얼마 안 있어 한일합방(韓日合邦)이 되자 비분(悲憤)을 억누르며 향리(鄕里)에 은거했다. 무과(武科) 합격증인 홍패(紅牌)를 장손(長孫) 우연(友淵)이 소장하고 있다. 묘소는 공이 만년에 기거하였던 영광 묘량 당산 산소동의 뒷산 기슭에 있다.
 
광열(光烈) [1885(고종 22)∼1966] (서화가)
양도공의 14대손이며, 월평군의 16대손이고, 아버지는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동식(東植)이다. 호는 효산(曉山)이다. 평생을 전주에서 살며 활동했던 서화가(書畵家)이다.
어려서부터 서예(書藝)에 정진하여 일제시대 선전(鮮展: 조선미술전람회)에 수차 입상(入賞)하였으며, 노경(老境)에는 호남(湖南)의 명필(名筆)로 일컬어졌다. 여러 서체에 두루 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군자(四君子)에도 탁월한 경지를 보였다.
효산과 친밀하였던 양도공 종손 경당(敬堂) 이용연(李龍淵)은 그의 「효산기((曉山記)」에서 이르기를,"연세(年歲)가 대질(大: 7,80세의 늙은 노인)을 넘겼음에도 기력(氣力)이 강녕(康寧)하고 신체(身體)가 굳건하여 날마다 난정(蘭亭: 왕희지)의 서법(書法)과 용면(龍眠: 송나라 때의 유명한 화가)의 그림 솜씨로서 예술(藝術)에 노닐어 늙음이 장차 이르는 것도 알지 못하였다."라고 칭송한 바 있다.
 
남규(南圭) (1901-1976)(종교지도자, 정치가)
양도공의 19대손이며, 병절교위 공의 16대손이다. 아버지는 진신(璡信) 이며, 전남 무안군 청계면 복길리 출생이다. 족보(族譜) 명은 의주(義宙)이며, 호는 춘곡(春谷)이다.
일찍부터 기독교 신앙에 눈 떠,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를 졸업하고 목사(牧師)가 되어 목회(牧會) 활동을 하였으며, 일제하에서 신사(神社) 참배(參拜) 거부로 2년여의 옥고(獄苦)를 치렀다. 해방 후에도 1947년에 한국 기독교회의 지도자 양성을 위하여 설립된 목포고등성경학교의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왕성하게 활동하던 중,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 목포지부장으로 추대되어 혼란기에 처한 민족의 나아갈 길을 모색하였다.
1948년 5ㆍ30 총선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소속으로 제헌의원(制憲議員)에 당선되었으나(1948년 5월 31일~1948년 10월 19일까지 재임.), 몇 개월 후 이어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간곡한 청에 의해 국회의원직을 사임하고 초대(初代) 전라남도지사(全羅南道知事)에 취임하여 새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그 후 이승만 정부의 독주(獨走) 행태를 보면서 자유당 세력과 결별하였다. 이후 다시 제5대 국회의원(國會議員: 參議員)에 당선되어 활약하였다.(민주당, 1960년 7월 29일부터 1961년 5월 16일까지 재임.)
그는 해방 직후에는 민족주의자적 입장에서 신탁통치(信託統治) 반대 운동에 앞장섰고, 제헌의회 시절에는 반민법(反民法) 제정을 통해서 친일(親日) 부역자(附逆者) 처벌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양심 있는 정치가였다.
다음은 해방 전후 목포 관련 사료(史料)에 등장하는 남규(南圭) 씨의 활동 양상이다. 이 자료를 통해서도 그의 치열했던 항일(抗日) 이력은 물론, 그가 추구했던 이상(理想)과 정치관(政治觀)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바이다.

(전략)해방과 함께 목포에서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건국준비위원회가 세워졌다. 목포의 건준은 8월 17일을 전후하여 결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목포 건준의 조직은 다음과 같았다.
위원장 : 이남규(李南圭) 부위원장 : 김백동(金百東), 국순홍 내무국장 및 교통부장 : 유치오 (兪致五) 선전부장 : 임영춘(林永春) 치안대장 : 임태오(林泰五)
이남규는 무안군 청계면 복길리 출생으로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로 활동한 바 있었으며, 신사참배 거부로 2년여의 옥고(獄苦)를 치룬 인물이다. (중략) 해방 이후 인민위원회의 주축이 된 인물들은 기독교계통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반일적인 태도를 끝까지 견지한 이냠규(당시 45세)와, 1930년대 이후 등장한 신진 사회주의자들로서 친일(親日)의 길에 들어가지 않은 자들이었다.
-목포역사찾기 블로그, 목포의 역사적 사건 중「해방 전후의 목포」2. 해방과 목포-
 
홍섭(弘燮) [1911∼1943] (독립투사)
양도공의 17대손이며, 한천당의 11대손이고, 문규(文奎)의 아들이다.
전북 임실군 지사면 안하리에서 태어나, 농업에 종사하던 중, 당시의 지식 인사들과 유대를 가지고 1929년 20세 되던 해부터 동지를 규합, 망국(亡國)의 현실에 대한 토론회를 갖는 등 항일(抗日)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배우지 못한 인근 청소년들을 모아 교육시킴으로써 향학열(向學熱)을 북돋고, 애국정신(愛國精神)과 항일사상을 고취시켰다.
아울러 공은, 우리나라가 자주독립국가임을 알리는 한편, 일제의 전쟁 도발에 대해 격렬히 비판하는 글을 써서 여러 동지(同志) 및 전국의 지사(志士)들에게 배포하였다. 결국 공은 1932년 1월 동지 이갑두(李甲斗)의 집에서 홍웅아(洪熊兒)·태동춘(太東春)과 같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년 6개월의 선고를 받아 전주형무소에서 옥고(獄苦)를 치르고 만기(滿期) 석방되었다.
공은 신장(身長)이 6척 장신에 체구가 건장하고 힘이 장사(壯士)여서 타 연루자보다 더욱 가혹하게 고문(拷問)을 당하여 여러 번 실신(失神)하였으나, 끝까지 연루자를 실토하지 않고 당당하게 항변하며 동지들을 보호하였다. 그러나 본인은 형무소에서 석방된 후 고문의 후유증으로 폐인(廢人)이나 다름없이 되어 몹시 고생하다가 광복(光復)된 조국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1943년 4월 5일, 향년 33세의 나이에 서거(逝去)하였다.
1993년 제48주년 광복절(光復節)에 공은 우리나라 건국사업에 이바지한 공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제1581호)을 추서(追敍)받았다.
부록: 양도공의 종후손(從後孫) 중 근현대 저명인사
-완풍대군 후손 이내(以內) 인물-
충숙공(忠肅公) 용익(容翊) [1854(철종 5)∼1907(광무 11)]

자는 공필(公弼), 호는 석현(石峴),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완풍대군의 16대손이며 양도공의 백형(伯兄) 완원부원군 안소공 양우의 15대손이다.
공은 철종 5년(1854) 함북 명천(明川)에서 진사(進士)·참봉(參奉)·고산현감을 지낸 아버지 병효(秉斅)와 강릉 유씨(江陵劉氏)는 시권(時權)의 따님인 어머니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공은 어렸을 때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나 `마천령산맥의 영봉인 상응봉(1,103m)고지의 정기를 받아 태어난 신동(神童)'이라고 불렸다. 그래서 향리 사람들은, 공이 훗날 벼슬길로 나아간 뒤 상응봉에서 번개만 치면 공의 벼슬이 하나씩 올라간 것을 알려주는 신호로 믿었다 한다.
공은 한학(漢學)을 수학한 후 출중한 실력이 인정되어 민영익(閔泳翊)의 천거로 감역(監役)이 되었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장호원(長湖院)으로 피신하자 남다른 빠른 걸음으로 연락을 취하여 고종의 신임을 얻어 단천부사(端川府使)로 특진하였다. 1887년 영흥(永興)부사, 함남병마절도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민란(民亂)이 일어나자 탐관오리로 탄핵받고 나주군(羅州郡) 지도(智島: 지금은 新安郡 소속.)에 유배되었다. 곧 풀려나 강계부사(江界府使)로 등용되었는데, 정계에 영향력을 크게 미치게 된 것은 1897년 내장원경(內藏院卿)에 발탁되면서였다.
그 후 감리서북광무(監理西北鑛務) 겸 감사철도사(監司鐵道司)를 거쳐 탁지부(度支部) 전환(典宦)국장이 되어 화폐개혁을 단행하였다. 이어 원수부(元帥府) 회계국 전환국장 ·서북철도국 총재 ·중앙은행 총재 등을 역임하고, 1902년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이 되어 이준(李儁) ·민영환(閔泳煥) ·이상재(李商在) 등과 개혁당을 조직하였다. 친러파의 수령으로 일본세력의 침투를 막기 위하여 1903년 평북 용암포(龍巖浦)의 조차권(租借權)을 러시아에 넘겨주기 위한 막후활동을 하면서, 내장원경으로서 황실(皇室)의 재산관리도 철저히 하였다. 1904년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가 체결된 후 배일(排日)친러파로 일본에 납치되었다가 이듬해 귀국, 경북관찰사에 등용되었는데, 그 동안 보성사(普成社) 인쇄소를 차리고 보성학원(普成學院: 지금의 고려대학교)을 설립하였다.
을사조약(1905) 체결에 반대하여 그 후 군부대신(軍部大臣)에 기용되었으나 사퇴하였다. 육군 부장(副將)이 되어 일제 세력의 축출을 위하여 프랑스 ·러시아 세력과의 제휴를 꾀하라는 황제의 밀령을 받고 프랑스로 가던 도중 풍랑으로 중국 산둥성[山東省] 옌타이[煙臺]에 기항하였다가 현지 일본관헌에게 발각되었는데, 책임추궁을 두려워한 본국 정부에 의하여 모든 권한을 박탈당하였다. 그 후 블라디보스토크 등지로 망명하여 구국운동을 계속하다가 병사(病死)하였다.

= 충숙공 =
 
순국열사(殉國烈士) 준(儁) [1859(철종 10)∼1907(광무 11)]
조선 말기의 순국열사(殉國烈士)이며, 애국계몽 운동가이다. 초명은 성재(性在)·여천(汝天)·선재(璿在). 자는 순칠(舜七), 호는 일성(一醒)·해사(海史)·청하(靑霞)·해옥(海玉)이다. 완풍대군의 17대손이며 양도공의 백형(伯兄) 완원부원군 안소공 양우(良祐)의 16대손이다. 함경남도 북청 출신이며, 병관(秉瓘)의 아들이다.
29세에 북청에서 초시(初試)에 합격, 1894년(고종 31) 함흥 순릉참봉(純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상경, 이듬해 신설된 법관양성소(法官養成所)에 들어가 6개월 후에 졸업하고, 1896년 한성재판소(漢城裁判所) 검사보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조신(朝臣)들의 불법과 비행을 들추어 파헤치다가 그들의 면관(免官) 운동 때문에 취임 1개월 만에 면직되고 곧 독립협회에 가담, 평의장(評議長)으로 활약하다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97년(광무 1)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과에 들어가 이듬해 졸업하고 귀국, 다시 독립협회 일을 보다가 무고로 간부 17명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수개월 후 석방되었다.
1899년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되자 민영환(閔泳煥)·이동휘(李東輝)·이상재(李商在) 등과 비밀결사 개혁당을 조직, 러일전쟁 후 일제의 한국침략과 친일 주구(走狗)들의 활동이 노골화하자 대한보안회(大韓保安會)를 조직하여 황무지 개척권을 얻으려는 일제의 음모를 폭로하고 일진회(一進會)와 대항하여 공진회(共進會)를 조직, 회장에 추대되었다. 친일대신(親日大臣) 5명을 성토하다가 피체, 철도(鐵島)로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민영환·이용익(李容翊)의 주선으로 석방된 후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하여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로 발전시켰다.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를 조직하여 보광학교(普光學校)를 세웠고, 함경도 출신 유학생 장학회인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조직, 뒤에 이를 서우학회(西友學會)로 발전시켜 오성학교(五星學校)를 세웠다. 그 해 평리원(評理院) 검사를 거쳐 특별법원검사가 되어 상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소신껏 재판하다가 미움을 받아 8개월 만에 평리원에 피검, 고종(高宗)의 특명으로 석방되어 검사(檢事)에 복직되었으나 법부대신의 책동으로 곧 파면되었다.
1907년 6월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밀령(密令)으로 이상설(李相卨)·이위종(李瑋鍾) 등과 합류, 헤이그에 도착했으나 일본측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고 순국(殉國)하였다. 분함을 참지 못하며 일장 연설과 함께 지니고 있던 단도로 할복(割腹), 선혈(鮮血)을 뿌리며 자결하였던 것이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追敍)되었으며, 그동안 헤이그에 묻혀 있던 유해(遺骸)는 1963년 서울 수유리 묘지로 이장(移葬)되었다. (참고문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호법영웅 일성 이준열사』 등.)
= 이준열사 동상 =
 
뼇룄怨 씤꽣꽬 議깅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