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국(開國)ㆍ정사(定社)ㆍ좌명공신(佐命功臣)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 완산부원군 양도공 이천우(李天祐) 영정 =
= 완산부원군 양도공 수결 =
 
위대(偉大)한 생애(生涯)
휘(諱)는 천우(天祐)이며, 양도공은 시호(諡號 : 임금, 정승 또는 유현들의 공덕을 기리어 죽은 뒤에 주는 이름 )로써 공을 일컫는 말이다. 공은 공민왕(恭愍王) 3년(1354) 완풍대군 휘(諱) 원계(元桂)와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남평 문씨(南平文氏) 사이의 제2남으로 탄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聰明)할 뿐더러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고, 풍채(風采)가 아름다웠으며, 그릇이 크고 도량(度量)이 넓었다.(『태종실록』의「졸기(卒記)」,"善射御 美風儀 有器度")
고려 공민왕 때 동녕부(東寧府)의 수령(首領)으로 있다가, 공의 재주를 유달리 아꼈던 숙부님 태조(太祖)의 휘하에 들어가 누차 왜구를 토벌해 공(功)을 세웠다. 여말(麗末) 선초(鮮初), 잦은 외침(外侵) 속에서의 국난 극복을 위한 공의 활약상은 찬연히 빛나고 있으니, 특히 고려 우왕 6년(1380) 남원(南原) 운봉(雲峰)에서 벌어진 황산대첩(荒山大捷)은 공이 종사관(從事官)으로 참전하여 남다른 용맹을 떨침으로써 명성을 만방(萬方)에 드날린 전투였다. 이 때 공은 귀와 코에 상처를 입어, 평생토록 얼굴에 그 흉터 자국이 남게 되었다. 【『양도공실기(襄度公實記)』에 의하면, 영조 이전까지 원형이 보존되었던 「영정(影幀)」의 원본(原本)에 그 상흔(傷痕)의 자취가 확연히 나타나 있었다고 한다.】
= 황산대첩비 =

조선 건국의 날(1392년), 만조백관(滿朝百官)과 백성들이 등극(登極)을 재촉하는 만세소리 속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태조를 부축하여 용상(龍床)에 모셨던 일화(逸話)가 『태조실록』에 여실히 전하거니와, 여말에 태조를 보좌하여 외적(外敵) 섬멸에 분투하였던 역정(歷程)과, 개국 과정의 중요한 고비마다 이뤄냈던 많은 수훈으로 인해 공은 1393년(태조 2) 8월에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봉해졌다. 1394년에는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가 되고, 1396년에는 강원도조전절제사(江原道助戰節制使)가 되어 왜구 방비에 노력하였다.
1398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었으며, 이 해 정도전 난(鄭道傳亂)이 일어나자 태종(太宗: 당시는 靖安君)을 도와, 형님 영안군(寧安君) 양우(良祐: 후일 完原府院君에 진봉됨.)와 더불어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에 책봉되고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졌다.
1400년(정종 2)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로 재직할 때 방간(芳幹)의 난이 일어나자 역시 태종을 도와 좌명공신(佐命功臣) 2등이 되고,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서 완산후(完山侯)가 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완산군에 개봉되었다.
1402년(태종 2) 안주도도절제사(安州道都節制使)가 되어 조사의(趙思義) 의 난(亂)을 평정(平定)한 후 함흥에 계시던 태조를 모셔왔다.
1404년 10월 종묘에서 태종을 대신해 척전(擲錢: 동전을 던짐.)하여 수도를 한성(漢城: 서울)으로 정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으며, 같은 달 판사평부사(判司平府事)에 임명되었다. 사평부는 조선 초기에, 재정(財政)을 맡아보던 관아로 태종 원년(1401)에 삼사(三司)를 고친 것인데, 공이 이때 이 기관의 최고 벼슬에 오른 것이다.

= 양도공 묘비 =
1407년에는 정조사(正朝使: 신년을 하례하는 사절.)로서 세자(世子: 양녕대군)를 배행(陪行)하여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곡부(曲阜)의 공자(孔子) 사당에 참배하니, 이는 조선이 숭유(崇儒) 문치(文治)의 국가임을 상징적으로 보인 것이다.
이듬해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 贊成事는 후일의 贊成, 종1품직.)에 오르고, 1409년 병조판서(현 국방장관)로서 삼군진무소(三軍鎭撫所)가 신설되자 도진무도총제(都鎭撫都摠制)를 겸하였다.
1410년 판의흥부사(判義興府事)에 이어 다시 찬성사가 되고, 판의용순금사사(判義勇巡禁司事)를 겸임했으며, 1413년 이조판서(내무, 행정 담당 장관)를 거쳐 서북면도체찰사(西北面都體察使)로 나갔다. 1414년 최고의 위계(位階)인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으로 진봉되고, 의금부도제조(義禁府都提調)를 지낸 뒤 다시 찬성사에 보직(補職)되었다. 의금부는 조선시대 왕명(王命)을 받들어 죄인을 추국(推鞫)하는 일을 맡아 하던 특별 사법기관이며, 이 기관의 최고위직이 도제조이다.
태종 16년(1416), 공은 이미 관작(官爵)과 위품(位品)이 지극히 높음을 경계하여 은퇴의 뜻을 아뢰자 태종은 만류 끝에 그간의 공로에 보답하고자 특별히 좋은 전답 80결과 노비 80명을 내리었다. 공은 다 사양하고 어구(御舊: 왕이 사용하는 깍지. 깍지는 활을 쏠 때 오른쪽 엄지손가락에 끼워 시위를 잡아당기는 기구.) 위의 매 노화송골(蘆花松)과 백송골(白松)을 원하였으니, 이는 왕이 매사냥에 치중하여 정사(政事)에 소홀함을 풍간(諷諫: 완곡한 표현으로 잘못을 고치도록 말함.)한 것이다. 태종은 그 깊은 뜻을 알고는 감격하여 그 매들을 내림은 물론, 아울러 화공(畵工)으로 하여금 공의 화상(畵像)과 함께 두 마리 매를 그리게 해 함께 하사하여 공의 청고(淸高)한 정신을 길이 전하도록 하였다. 이 때 그려진 「영정(影幀)」과 「이응도(二鷹圖)」는 영조대에 새로이 모사(模寫)되어 지금까지 종가에 전하고 있다.
 

= 이응도(二鷹圖) - 전남 문화재자료 146호 =

 
서거(逝去) 후의 추모사업(追慕事業)ㆍ문화재(文化財) 지정(指定)

태종 17년(1417년) 4월 25일 공이 서거하자 왕(王)은 몹시 슬퍼하여 3일간 조회(朝會)를 정지(停止)하고 오래도록 고기반찬을 들지 않았다. 시호를'양도(襄度)'라 내리니, 전쟁에서 공(功)이 많음과 마음이 능히 의(義)를 제어함을 기려서 명명(命名)한 시호이다.
양도공의 유해(遺骸)는 성대한 예장(禮葬: 지금의 國葬)으로 고양군(高陽郡)의 이름난 명당(明堂)인 학령산(鶴翎山), 곧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성석동 웃감내[上柑川] 산 203번지에 모셔졌다. 당시 조정에서는 원훈(元勳)에 대한 두터운 예우(禮遇)로 여러 달에 걸쳐 사패지(賜牌地: 국가에서 내린 토지)에 묘역(墓域)을 조성하였고, 수십칸의 재실(齋室: 高陽齋, 현 건물은 1899년 건립되었던 것을 1960년 이후 重修한 것임.)을 건립하여 묘소를 수호하고 향사(享祀)하게 하였다.
종손(宗孫)들은 해마다 천 리 먼 곳 영광 땅에 거주하면서도 문중 유사(有司)들과 더불어 상경하여 시제(時祭)를 올렸고, 선산(先山) 아래 거주하는 후손들의 도움을 받아 묘역(墓域)을 관리해왔다. 최근 2003년에는 양도공 재경종친회의 주도 아래 전국의 후손들이 뜻을 모아 묘소의 대대적인 조경(造景)ㆍ성역화(聖域化) 사업을 시행하여, 엄숙하고도 우아한 모습으로 묘역을 새로이 단장하였다.

= 완산부원군 양도공 이천우(李天祐) 묘소 전경 =

양도공 서거 후, 공의 생애를 기리는 사업은 먼저 국가 차원에서 시행되었는데, 점차 후손과 사림(士林)들의 추모 사업으로 이어지며 지금까지 600여 년 간 계속되었다.
성군(聖君) 세종대왕(世宗大王)은 등극 후 태종조의 사병(私兵) 혁파(革罷) 정책에 유일하게 찬의(贊意)를 표했던 공을 추모하여 식견(識見) 높은 재상이라 칭송했으며, 1426년(세종 6년)에는 태종 치세(治世)에 부왕(父王)을 가장 훌륭히 보필했던 분으로 하륜(河崙)과 공을 거명하고, 태종 묘정(太宗廟庭)에 배향(配享: 종묘에 공신을 함께 모심)하였다.

 
= 종묘공신당 신주봉안도 =   = 종묘공신당 양도공신위 =
문무(文武) 겸전(兼全)의 장수(將帥)이자 정치가로서 숱한 외침(外侵)을 막아내고 유교국가 수립과 부국 강병(富國强兵)에의 기반을 다진 공의 훌륭한 족적(足跡)은 길이 후대의 사표(師表)가 되었기에, 1616년(광해군 8년)에는 후손과 사림(士林)들이 공의 부조묘(不廟: 사당)와 종가(宗家)가 있는 전라도 영광(靈光) 땅에 영당(影堂: 지금의 畝長書院)을 건립하여 공의 위패(位牌)와 태종이 하사한 「영정(影幀)」, 「이응도(二鷹圖)」를 봉안하였으며, 해마다 춘추(春秋) 향사(享祀)를 거행하고 있다.(2월과 9월의 中丁)
근년에는 공의 부조묘ㆍ종가(전남도 민속자료 제22호)와, 「영정」, 「회맹축(會盟軸)ㆍ이응도」의 목판(木板) 등이 역사적 유서와 더불어 미술사적 가치까지도 인정받아 지방문화재(전남도 제146호)로 지정된 바 있다.
 

= 이응도 목판 - 전남 문화재 자료 146호 =

 

= 회맹축(會盟軸) - 전남 문화재자료 146호 =

 
배위(配位)와 자손(子孫)
공의 배위(配位)는 두 분이다. 정경부인(貞敬夫人) 여흥 민씨(驪興閔氏)는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의 따님이고, 또 한 분의 배위인 정경부인 황보 씨(皇甫氏)는 황보 담(皇甫 聃)의 따님이다.
슬하에 여양군(驪陽君) 굉(宏), 여성군(驪城君) 완(完), 여흥군(驪興君) 선(宣)의 3남을 두었다. 여양군은 태종조에 동지총제(同知摠制)를 지내고 후일 이조판서에 증직되었고, 여성군은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ㆍ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를, 여흥군은 판서(判書)를 지냈다. 양도공의 후손은 10여 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 중 여양군의 후손은 전남 영광(靈光)을 위시한 전남북 일원과 수도권 일대에, 여성군ㆍ여흥군의 후손은 고양시 일산 선영(先塋)을 중심으로 한 경기도 일원에 거주하고 있다.
 
후인(後人)의 예찬(禮讚)

조선조 말엽의 성리학자로, 을사조약(乙巳條約) 체결을 보고 비분강개를 못 이겨 순국(殉國)한 송병선(宋秉璿)은 일찍이 양도공의 구국 단충(救國丹忠: 나라를 건져내려는 간절한 충성심.)과 부정 척사(扶正斥邪: 바른 도를 수호하고 사특한 것을 배척함.)의 정신을 다음과 같이 예찬하였으니, 여기에서도 우리는 공의 위대한 생애를 그 일단(一端)이나마 살필 수 바 있는 바이다.

於維襄度(어유양도)아! 양도공께서는
王室懿親(왕실의친)왕실의 가까운 친척이시라.
乃贊興運(내찬흥운)일어나는 운을 협찬하여
除殘扶眞(제잔부진)흉적을 제거하고 참된 것[眞]을 부축하였도다.
三策勳盟(삼책훈맹)세 번이나 공신에 책봉되고
名耀麟閣(명요린각)그 이름이 기린각에 빛나시도다.
會朝淸明(회조청명)조정이 맑고 밝으니
王曰乃績(왕왈내적)왕께서 그대의 공적이라 말씀하셨도다.
公以謙嗚(공이겸명)공이 겸손으로써 세상을 울리니
恩寵愈隆(은총유륭)은총이 더욱 융성하였도다.
奉身求退(봉신구퇴)국가에 헌신한 뒤에 물러나기를 구하시니
善始善終(선시선종)시작을 잘하고 끝맺음을 잘하셨도다.
本之則有(본지칙유)근본으로 삼으신 것이 있었으니,
尊尙儒術(존상유술)유학의 도를 높이 숭상하고
闢佛以嚴(벽불이엄)불교를 엄하게 배척하여
變麗謠俗(변려요속)고려조의 풍속을 변화시켰도다.
在家而達(재가이달)집에 있을 때부터 총명하셨더니
移孝爲忠(이효위충)효도가 옮겨져 충성(忠誠)이 되었도다.
山河帶礪(산하대려)산과 강이 숫돌과 띠 되도록 잊지 않으리라 왕이 맹세하시니
名譽無窮(명예무궁)그 이름 기림이 다함이 없으리라.

= 양도공실기(13대손 신봉공 복원 찬술) =
 
= 양도공 실기 서문 일부 =
 
양도공의 형제분들

안소공(安昭公) 양우(良祐)는 완풍대군의 장남이자 양도공의 형님이다. 공은 여말(麗末)에 벼슬길에 나아가 우왕(禑王) 때 사복시정(司僕寺正: 고려·조선 시대 궁중의 가마·마필(馬匹)·목장 등을 관장한 관청의 으뜸 벼슬. 정3품.) 등을 역임했으며, 조선 건국 직후에는 태조의 근친(近親)으로서 여러 왕자들과 함께 영안군(寧安君)에 봉해졌다. 정도전(鄭道傳)의 난 수습에 협찬하였으므로 정사(定社) 2등 공신에 책봉되었으며, 태종 2년(1402)에는 의정부(議政府) 찬성사(贊成事)가 되었고, 태종 8년(1408)에는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태종 12년(1412) 완원부원군에 진봉된 후 품계가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錄大夫)에 이르렀다. 슬하에 3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높은 벼슬을 지냈다. 특히 장남인 선평군(善平君) 흥발(興發)은 시호가 평안(平安: 시법은 治而無生平(치이무생평), 好和不爭安(호화불쟁안))으로, 세종조에 동지중추원사,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병조판서 등 요직을 지내고, 사은부사(謝恩副使)ㆍ절일사(節日使)로 명나라에 두 번이나 다녀왔던 인물이다. 전국에 1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안소공의 후손들 대부분이 선영이 모셔진 함경도 일대에 살았는데, 그 중 저명한 분이 헤이그 밀사(密使) 사건의 이준(李儁) 열사(烈士)와, 고종황제의 최측근으로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 등을 역임하고 블라디보스톡에 망명(亡命)해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서거한 충숙공(忠肅公) 이용익(李容翊)이다. 안소공의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대심리 능곡에 있다.

아우 완남군(完南君) 조(朝)는 완풍대군의 3남이다. 공은 고려말에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으며, 조선 초기 왕실의 근친(近親)으로서 처음에는 완평군(完平君)으로 봉군되어 상장군(上將軍) 등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외아드님 여안군(驪安君) 군실(君實)은 정조진전사(正朝進箋使) 부사(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등을 지냈고, 손자 진릉군(晉陵君) 세문(世門)은 세종 5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사헌부 집의(執義)를 거쳐 함길도도진무사(咸吉道都鎭撫使)가 되었다. 후손들이 강원도 양양(襄陽) 일대에 거주하고 있다.

아우 완령군(完寧君) 서(曙)는 완풍대군의 4남이다. 공은 이름을 후일 백온(伯溫)으로 고쳤는데, 조선 건국 후 왕실의 근친(近親)으로서 원윤(元尹: 고려ㆍ조선 초기 왕족에게 수여된 품직. 정2품으로 君과 같음.)이 되었고, 태종조에 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등을 역임했으며, 태종 14년에는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세종 1년에 서거하니, 세종은 소사(昭思)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후손들이 대부분 이북 땅인 황해도(黃海道) 일대에 거주하고 있다.

양도공의 자매(姉妹)는 세 분으로 전하는데, 모두 그 당시 명문가(名文家) 출신들과 혼인하였다. 이 중 저명한 이는 완풍대군의 막내사위인 변중량(卞仲良, 1345~1398)이다. 그의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호는 춘당(春堂)이며, 정몽주(鄭夢周)의 문인(門人)이다. 변계량(卞季良)의 형(兄)이기도 했던 그는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분이다. 빙부(聘父: 장인)인 완풍대군의 사후 태조 측의 기밀 사항을 공양왕(恭讓王) 측에 몰래 알려준 일도 있었고, 태종의 정몽주 제거 계획을 스승에게 미리 알려주기도 했던, 역성혁명(易姓革命: 타성(他姓)에 의한 왕조의 교체.)을 꿈꾸는 태조의 세력과는 시종일관 노선(路線)을 달리한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완풍대군의 여말(麗末) 행적과 깊은 함수관계를 갖는 분임을 유추할 수 있다. 그는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사(密直使)를 지냈으며, 1398년 우부승지(右副承旨)를 거쳐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이르렀으나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 일파로 몰려 참화(慘禍)를 당하였다. 시(詩)에 능하였으며, 문집에 『춘당유고(春堂遺稿)』가 있다. 거창(居昌)의 병암서원(屛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참고 문헌: 고려사, 고려사절요, 태조ㆍ태종ㆍ세종실록, 국조보감, 양도공실기, 연재집, 묘장서원지, 완풍보감, 국사편찬위 한국사, 한국인명대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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