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조 묘소의 조성에서 2008년 현재까지의 역사
= 묘소와 고양재 전경 =
 
양도공의 서거(逝去)와 묘소의 조성
양도공은 태종 17년(1417) 4월 25일 정침(正寢)에서 돌아가셨다. 탄생(誕生) 연대가 역대의 보첩(譜牒)이나 정조(正祖) 때 13대손 신봉(新峰) 복원(馥遠) 공이 지은「양도공유사(襄度公遺事)」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공민왕 갑오년(1354)인 바, 양도공은 예순 네 살에 돌아가신 셈이다.
공이 서거(逝去)하시니, 태종께서는 심히 놀라고 애통해하였고, 여러 날 동안 고기반찬[肉饍]을 금하며 추도(追悼)의 정을 다하였다. 부음(訃音)이 도달하자 사흘 동안 조회(朝會)를 철폐하였으며, 제사를 내려 위로하였는데, 부의(賻儀)로 쌀과 콩 아울러 70석과 종이 150권을 하사(下賜)하였다. 시호(諡號)를 양도(襄度)라 하니, 시법(諡法)은 전쟁에 공이 있음을 ‘양(襄)’이라 하고, 마음이 능히 의(義)를 제어함을 ‘도(度)’라 한다.
그 해 6월 4일 태종은"완산 부원군(完山府院君) 이천우의 장례가 8월 23일에 있으니, 회격(灰隔)을 써서 매장하고, 그 광(壙) 밖에 소용되는 큰 돌은 추수(秋收)를 기다려서 실어들이라."분부하였다. 묘소 석축(石築) 등에 쓰이는 돌 등이 길가의 곡식을 밟아 손상(損傷)시킬까 염려하여서였다는 사관(史官)의 부연이 있지만, 이상의 기사(記事)들을 볼 때, 임금은 공을 특별히 예우(禮遇)하여 성대한 예장(禮葬: 국장)을 치르게 하였을 뿐더러, 장의(葬儀) 방법이나 석물(石物) 운반 등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썼던 것을 알 수 있다.
동년(同年) 8월 23일, 공의 유해(遺骸)는 고양군 학령산(高陽郡 鶴翎山)-지금의 고양시 성석동(城石洞) 상감천(上甘川: 俗名 웃감내) 산 203번지-에 모셔졌다. 양도공의 묘소는 예로부터,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은 여말(麗末) 충신(忠臣) 최영(崔瑩) 장군의 묘소와 함께 고양(高陽) 8명당(八明堂)의 하나라고 전해진다. 풍수지리학(風水地理學)으로 볼 때, 자손들이 번성하고 무궁한 복록(福祿)을 누릴 수 있는 혈(穴)이라는 것이다. 과연, 후손들의 수효가 현재 10만이 넘고 역대 후손 중에 충ㆍ효ㆍ열로 빛나는 숱한 인재가 배출된 것을 보면 이 말이 결코 허언(虛言)은 아닌 듯하다.
 
종손과 영광 묘장(畝長) 문중(門中)의 묘소ㆍ재실 관리
= 완산부원군 이천우(李天祐) 행적 현판 =
교통이 불편했던 시절, 종가가 있는 본동(本洞)인 영광(靈光) 일대와 고양(高陽) 선산(先山)의 거리가 멀어서 후손들이 자주 내왕(來往)할 수는 없었지만 종손과 도유사(都有司), 그 밖의 문중 대표들은 시제(時祭)를 모시기 위해서 혹은 선산(先山)과 산소(山所)를 돌보기 위해 가끔씩 상경(上京)하였고, 500여 년 간 산소(山所)의 모든 일은 종가가 있는 묘장(畝長) 문중(門中)에서 처결(處決)하였다. 4대 종손 세원(世元) 공이 종통(宗統)을 완전히 확립했을 당시는 물론 그 이후 상당 기간 동안 양도공 묘소에는 아직 태종조 예장(禮葬) 때 국가(國家)에서 함께 하사(下賜)한 많은 전답(田畓)과 재실(齋室)이 남아 있어 관리에 별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아 있는 여러 문헌을 살펴볼 때, 양도공의 역대 종손(宗孫)들이 주도적(主導的)으로 선산(先山) 관리와 봉제사(奉祭祀)를 봉행(奉行)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양도공유사(襄度公遺事)」에는 정조조의 인물인 양도공 14대 종손 성균관(成均館) 진사(進士) 이석(以錫) 공이 양도공 묘소의 개초(改莎)를 주관(主管)하면서 양도공의 행적(行蹟)이 담겨 있을 지석(誌石)을 찾아 묘소의 봉분(封墳)을 열어 숯과 석회[炭灰]에까지 파보았다는 기록이 실려 있으며, 20대 종손 경당(敬堂) 용연(龍淵) 공이 저술한『고양재중건일기(高陽齋重建日記)』에는 고종조(1899년)의 고양재 중건시에도 19대 종손(宗孫)인 의갑(義甲)공을 대행하여(代行) 통정대부(通政大夫) 휘(諱) 심백(心白) 공이 상량문(上樑文)을 썼음을 밝히고 있다. 이어 1902년에 이루어진 신도비 건립 사업 또한 의갑 공의 주도에 의해 이루어졌다. 또, 일제하인 1932년 양도공 묘소가 도굴(盜掘)되었을 때 산지기의 전보(電報)를 받고 급히 상경하여 일을 수습한 것이나, 1940년의 고양 선산(先山) 일대(一帶) 문중(門中) 토지의 신탁(信託) 계약(契約) 체결, 1960년의 고양재 중건이라는 대역사(大役事) 추진 역시 종손 용연(龍淵) 공과 묘장 문중의 대표들이었다.
 

재실(齋室) 고양재(高陽齋)의 거듭된 중건(重建)

= 고양재 중건일기(경당 저술) =
조정(朝廷)에서는 건국(建國) 원훈(元勳)에 대한 예우로 여러 달에 걸쳐 묘역(墓域)을 조성한 데 이어, 사패지(賜牌地)인 묘역(墓域)에 수십 칸짜리 재실(齋室)을 건립(建立)하여 묘소를 수호(守護)하고 향사(享祀)하게 하였다.
양도공 묘소의 재실(齋室) 고양재(高陽齋)는 현재 묘소 아래 우측(右側)에 위치하고 있다.『고양재중건일기(高陽齋重建日記)』(敬堂 李龍淵 著, 1960)에 의하면, 묘소 아래에 당초 32칸의 재실과 90여 두락의 전답(田畓)이 있었다는데, 재실은 일기 쓰는 그 시점(時點)에서 125년 전인 을미년(1835)에 소실(燒失)되었고, 전답(田畓)은 선영 아래 거주하는 여성군(驪城君) 후손들의 관리(管理) 부실(不實)로 거의 없어졌다고 한다.
고양재(高陽齋)의 현 건물은 1899년에 중건(重建)한 것을 1961년에 또다시 중건(重建)한 것이다. 재실이 너무 퇴락한 것을 안타까이 여긴 종손(20대 종손 敬堂 諱 龍淵)과 문중 원로들이 1959년 9월에 처음 발의하여, 전북 고창(高敞) 어느 명가(名家)의 사랑채를 매입해 옮겨 세운 것이 현재의 재실이다. 「고양재 상량문」에 의하면 발의 후 완공까지 약 2년의 기간이 소요되었던 듯하다. 전후(戰後) 어려웠던 시절이지만 후손들의 성금(誠金)으로 당시로서는 큰 역사(役事)가 이룩된 것이다.
= 고양재 =
고종조(高宗朝)인 광무 6년(1902) 19대 종손 의갑(義甲) 공은 양도공 묘소에 묘도문자(墓道文字)가 없음을 안타까이 여겨 문중의 의사를 규합한 끝에 신도비(神道碑)의 건립을 추진하였다. 신도비문(神道碑文)은 의갑 공이 청하여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던 대성리학자 송병선(宋秉璿: 文忠公, 을사조약 때 殉國)이 찬술하였다. 신도비는 이 해에 묘에 들어가는 입구에 세웠다. 이 신도비는 1978년 20대손 대연(大淵) 종현이 개수(改竪: 다시 세우다)하였는데, 두전(頭篆)은 옛것을 그대로 옮겨 새기고 종후손(從後孫) 학용(學庸)씨가 새로 글씨를 써서 새겼다. 묘비(墓碑)는 1979년 18대손인 유신(有信)ㆍ19대손인 해진(海鎭) 종현이 새로 세웠다.
= 완산부원군 양도공 이천우(李天祐) 신도비 =
산변(山變)-묘소 도굴(盜掘) 사건-의 발생
1932년 3월 25일 밤에 양도공 산소에 흉변(凶變)이 발생했다. 도굴범들이 부장품(副葬品)을 노려 묘소를 파헤친 것이다. 익일(翌日)인 26일 오후 5시경에 특별 전보를 접수한 종손(龍淵 공)은 즉시 문회(門會)를 개최하였던 바, 많은 일가(一家)들이 모여들어 노소(老少) 할 것 없이 서로 마주보며 통곡(痛哭)하였다.
문회(門會)의 결정대로 종손과 문봉(文鳳)씨는 다음날 27일 새벽에 출발하여 당일 감천리(柑川里) 산소(山所)에 도착하였는데, 묘소를 살핀즉 파헤쳐진 관곽 위로 유해(遺骸)가 드러나 있어 차마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두 분은 망극하고 비통(悲痛)한 마음에 통곡을 그치지 못하면서도 안장(安葬)의 절차를 진행하였다.
두 분은 다시 서울로 나와 관(棺)과 제복(祭服), 천막(天幕), 제물(祭物) 등을 준비한 후 문복(文復), 현승(鉉升) 두 분을 동반(同伴)하여 묘소로 돌아왔다. 이윽고 4월 1일부터 묘소를 수리하고 안장해 모시기 위한 역사(役事)를 시작하였는데, 이 때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산소 아래 부락민들이 백여 명이나 달려와, "부원군 산소가 이런 참사(慘事)를 당하였는데 좌시(坐視)하는 것은 우리의 도리(道理)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연 4일 동안이나 나와 일을 도와준 것이다. 그래서 비록 막대한 비용은 났으나, 역사(役事)만은 여의(如意)하게 완료하였다고 한다. 안장 후 제사 올리면서 아뢴 축문(祝文)이 지금까지 종가에 전한다. 당년 4월 9일자의 고유문(告由文)이다.
= 양도공 산소 도굴 수습후 고유(告由)한 축문 =
 
선산(先山)의 등기(登記)와 신탁계약, 종중의 소유권 확립
선산(先山)과 일대 부속 토지(土地)는 별다른 등기 문서 없이 조선왕조 500년을 내려오다가 일제(日帝)의'조선부동산등기령'(1912)에 의해 묘소 아래에 사는 후손 종오(鍾五), 종순(鍾舜) 명의로 1917년에야 등기(登記)되었다. 이분들은 양도공의 차남인 여성군(휘 完)의 후손들로 선영 아래 500여년 세거(世居)하며 산소 수호[山直]역할을 해오던 이들이기에 우선 임시 조치로 명의(名義)를 빌린 것이다.
하지만, 선산을 후손 개인 명의로 오랜 기간 둔다는 것은 아무래도 불안한 일이었기에 1940년에 이르러 20대 종손 용연(龍淵) 공이 주도하여, '미구(未久)에 그 명의를 원래의 소유주인 문중(門中)으로 환원(還元)하기로 한다'는 내용의 신탁(信託) 계약(契約)을 성립시켰다. 선산(先山) 20정 7반 7묘와, 전답 2,541평에 대한 신탁계약이었다.
= 고양 선산 및 부속 위토에 대한 신탁계약서 =
양도공 종중은 이 계약에 따라 1966년 선산(先山)과 위토(位土)의 명의를 후손(後孫) 대표 15인 연명(連名)으로 등기 이전하였다. 이제 양도공 종중 소유로 소유권이 사실상 환원된 것이다. 선산은 20정 7반 7묘, 밭이 144평, 논이 2,288평으로 등록되었는데, 이는 일가들이 헌성한 위토를 포함한 총량이었던 바, 그런데도 1940년 신탁계약 당시보다도 상당량의 전답이 축소된 규모였다. 이는, 산소(山所) 수호인(守護人)이 선산(先山)과 위토(位土)의 명의(名義) 환원에 전폭 협조하게 하기 위한 고육책(苦肉策)이 개재(介在)된 불가피한 결과였다.
선산과 부속 토지[田畓]는 이후 1972년부터 몇 년 간 22대 종손 규헌(奎憲)과 도유사(都有司) 현오(鉉午) 씨 양인(兩人) 명의로 등록되는 과정을 거쳐, 1980년에 특별조치법이 발효됨을 기회로 삼아 연명(聯命) 등기(登記)는 해제되고, 드디어 양도공 종중(襄度公宗中) 명의로 정식(正式) 등기되었다. 등록번호는 112180-3138811이다.
 
후손들의 위토(位土) 마련과 희사금 헌성
신탁계약 이후 양도공 종중(宗中)에 실질적으로 인계되어 후일 등기(登記) 이전(移轉)된 전답(田畓)은 겨우 6.5두락이었다. 따라서, 이 정도 재정(財政)으로는 선조의 시제(時祭)조차도 올리기 어려운 형편이었으므로 1958년에 본동(本洞) 문중에서 3.8두락(765평), 1972년 재경종친회에서 6.5두락(1,503평)을 더 사 보태 총 17두락을 조성하였고, 여기에서 소작료로 쌀 7섬을 받아 시제 비용으로 충당하였다.
그러나 점차 그것만으로는 경비가 많이 부족하였으므로 일부분은 후손 중 유지자(有志者) 특히 재경종친회 회원들의 희사금(喜捨金)에 의존해왔다. 근래에는 교통의 발달과 함께 수많은 자손들이 시제일에 운집하여 참배하는 대단위 추모 행사를 치르게 되니, 식사나 음식 제공 역시 만만한 비용이 아니었던 것이다.
 
고양시 향토유적(鄕土遺蹟)으로의 지정(指定)
= 향토유적지 지정 현판 =
양도공 묘소는 모셔진 인물인 양도공의 역사적 비중, 민족사적 기여도, 묘소 자체의 역사성 등이 인정되어 1986년 6월 16일 경기도 고양시(高陽市) 향토 유적(鄕土遺蹟) 제7호로 등록되었다.
그러나 고양시 경내에 유택(幽宅)이 모셔진 어느 역사인물보다도 훌륭한 어른의 유적(遺蹟)인데도 경기도 정식(正式) 문화재가 되지 못한 것은 후손들의 크나큰 아쉬움이었다. 그래서 양도공 재경종친회에서는 수년 전부터 후손들의 여망(輿望)에 따라 문화재 격상(格上)을 위한 만반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바, 2003년에 이루어진 묘소의 대대적인 조경(造景)ㆍ성역화(聖域化) 사업도 그 노력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고양재 발전 계획안의 수립
문중의 합의로 양도공 산소와 고양재, 선산ㆍ위토를 양도공재경종친회(襄度公在京宗親會)가 그 관리를 하기로 하고 주된 사명(使命)이 된 고양 선산의 관리와 관련하여 그 재정의 확충과 합리적 운영을 위해 그간 재경 종현님들의 성금에 의존하는 방법등 실로 숱한 방책(方策)을 마련해보았으나 그것은 한때의 미봉책(彌縫策)에 그치고 말았다.
우선, 후손들의 혈성(血誠)에 의해 마련된 상당량의 위토(位土)에도 불구하고, 근래에는 시대적 추세로 소작료(小作料)는 인하되고 미곡(米穀)의 수매 가격도 낮아짐으로써 그 영농(營農) 수익으로는 시제(時祭) 봉행과 선산(先山) 관리에 따르는 비용을 충당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선산과 위토(位土)의 효율적 운용으로 재정 위기를 타개하는 방책을 모색해야 했다. 더욱이 산업화ㆍ핵가족화의 영향으로 숭조(崇祖) 돈종(敦宗)에 대한 인식이 점차 희박해지는 추세를 볼 때, 종사백년지대계(宗事百年之大計)를 위한 획기적 방안의 수립은 참으로 시급한 일이 되었다.
또한 선산은 일부는 유휴지화(遊休地化)하였고, 인근 민가(民家)에서 무단으로 분묘(墳墓)를 설치하는 등 침해가 극심한 지경에 이르렀다. 또, 위토(位土: 논밭)는 지역민들의 영농(營農) 기피로 인해 일제(一齊) 정리가 불가피한 상황이 되었다.
후손들 모두가 이러한 현실을 통탄하던 중 우리 양도공 종중 종원들의 중지(衆智)가 모아져 2001년 6월 1일 양도공재경종친회 정기총회에서 양도공회관(襄度公會館) 건립을 주요 목적 사업으로 하는'고양재발전계획안(高陽齋發展計劃案)'이 전 총무이사이던 동건(東健) 종현에 의해 발의(發議)되었으며, 이는 만장일치(滿場一致)로 의결되었다.
 
경당공적비의 추진(推進)과 건립(建立)
2005년 11월, 양도공 문중을 중흥(中興)한 경당의 한평생에 걸친 위선(爲先)과 위국(爲國)의 빛나는 행적을 영구히 기리기 위해, 동재(東宰)회장의 발의로 장섭(章燮: 공동추진위원장, 완풍대군파종회장)ㆍ용주(容珠: 공동추진위원장, 양도공파종회장)ㆍ동재(東宰: 집행위원장, 양도공재경종친회장) 씨를 위시한 문중(門中)의 유지(有志) 종현들이 뜻을 모아 '경당이공적비추진위원회(敬堂李公功績碑추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전국(全國) 일가(一家)들의 전폭적 호응으로 답지(遝至)한 모금(募金)에 의해 제작된 비(碑)를 2006년 3월에 고양 일산의 양도공 묘역에 세웠고(敬堂李公龍淵功績碑, 추진위 지음, 如海 在哲 씀. 敬堂贊, 昌憲 지음.), 2007년 5월에는 담양군 월산면 용암리 홍암 선산의 명산재(明山齋) 뜰 안에 세웠다.(敬堂李公龍淵紀蹟碑, 秋汀 東奕 지음, 如海 在哲 씀.)
= 경당 이공 용연(龍淵) 공적비 =
= 경당 이공 용연(龍淵) 공적비건립기금 헌성비 =
 
역대 재경종친회장과 유지(有志) 종현(宗賢)들의 활동(活動)

양도공재경종친회는 1972년에 발족(發足)되었다. 1950년대에 일찍부터 상경(上京)ㆍ거주(居住)하며 고양재 유사(有司)로서 산소, 재실 관련 모든 일을 위임받아 처리하던 인섭(燮) 종현이 서울 및 수도권 거주 양도공 후손들의 대동 단합과 위선사업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 종친회의 결성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양도공재경종친회의 결성을 주창(主唱)하였던 바, 종원들의 전폭 지지에 의해 드디어 이 모임이 정식 단체로 출범하였던 것이다.

- 인섭(燮, 1906~1987, 사부공파)
초대 양도공재경종친회장은 1971년 재경종친회를 창립하여 1984년까지 14년간 회장으로 재임하면서 특유의 위선심(爲先心)과 지도력(指導力)으로 종사의 기반을 튼튼히 다진 분이다. 이분의 재임(在任) 당시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공적비(功績碑)가 양도공 산소 아래 세워져 있다. 함께 종사를 추진한 유신(有信)ㆍ해진(海鎭)ㆍ동건(東健) 종현의 방명(芳名)도 함께 등재(登載)된 공적비(功績碑)이다. 인섭 종현은 완풍대군파종회의 창립을 주도(主導)한 분이기도 하다
- 유신(有信, 1924~1992, 주부공파)
2대 회장은 1984년에 부임하여 1992년 작고(作故)할 때까지 종사에 성심(誠心)ㆍ성의(誠意)로 봉무(奉務)하였다. 그는 영광읍(靈光邑) 고성리(古城里) 출신으로 삼화주택(三和住宅)을 설립하여 사업에 성공한 뒤에는 오직 위선사업(爲先事業)과 사회사업(社會事業)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한평생을 보냈다. 대소(大小) 종사에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다 할 정도로 거금(巨金)을 아끼지 않고 쾌척(快擲)하며 숭조 돈종에 열성을 다하였다. 재경종친회장 재임 중에 있었던 양도공 산소ㆍ고양재의 대대적 보수(補修)도 그의 성금(誠金)에 의해 완수되었다.
- 해진(海鎭, 1938~1998, 사부공파)
3대 회장은 1992년부터 1998년까지 봉무하였다. 그는 고창(高敞) 성송(星松) 출신으로 일찍이 사법고시(司法考試)에 합격하고, 서울지검(地檢) 검사(檢事)를 거쳐 서울변호사회 총무, 사법연수원 교수 등을 지냈으며, 공무(公務)로 바쁜 중에도 일찍부터 종사에 참여하여 문중(門中)에 많은 공헌(貢獻)을 하였다. 특히 법률가(法律家)로서 선산(先山) 문제 등 난마(亂麻)처럼 얽힌 문중사 해결에 커다란 기여가 있었다.
- 동보(東保, 1933~ , 종파)
제4대 회장은 양도공 20대 종손 경당(敬堂) 공의 4남이다. 일찍부터 고양 선산(先山) 관리와 고양재 보수(補修) 등 종사에 힘을 기울였다. 1998년, 임기 중 작고한 해진 회장(會長)의 뒤를 이어 수석 부회장으로서 업무를 승계(承繼)하였다. 전임 회장 유고(有故) 직후부터 회장으로서의 실질적 업무를 수행해왔으나, 회규(會規)에 의해 정식(正式)으로 회장에 취임한 것은 2001년의 일이다. 취임 후 그는 문중의 원로(元老)ㆍ대표(代表)들과 함께 '고양재발전계획안'을 수립하였고, 문중(門中)의 여론(輿論)에 따라 고양 선산(先山)의 일부를 정리하여 양도공회관을 마련하는 등 중책(重責)을 완수(完遂)하였다. 또, 2003년에는 양도공 산소의 정비(整備)ㆍ대대적인 성역화(聖域化) 작업을 주도(主導)하였다.
= 양도공 길 안내 =
- 동재(東宰, 1939~ , 종파)

제5대 회장은 강재(剛齋) 석연(石淵) 공의 아들이며, 양도공 20대 종손 경당의 조카이다. 그는 1972년 보사부 공무원 재직 시절, 고양 일산의 선산(先山)으로 통하는 길이 너무 협착해 통행이 불편한 것을 안타까이 여겨 경기도에 부탁, 예산을 편성해 도로(道路) 확장공사를 시행하도록 주선한 바 있다. 그 도로가 지금은 말끔히 포장되어'양도공로(襄度公路)'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그 때 이래, 종사에 참여하여 재경종친회 감사(監査)를 역임하였고, 2005년 6월에 회장에 선임(選任)되었다. 그는 우선 숭조 돈종의 기풍 진작을 위하여 양도공 문중을 중흥(中興)한 경당(敬堂)의 기념사업을 주창(主唱)하여 2006년 3월에 양도공 묘역에 경당공적비를, 2007년 5월에는 담양 명산재 안에 경당기적비를 세웠다. 2008년에는 선조 유적지 조경(造景)ㆍ식목(植木) 사업 및 선조(先祖) 추모(追慕) 글짓기 대회를 추진하였으며, 종사 현대화를 위해 인터넷 홈페이지 개설을 적극 추진 중이다.

지금까지 양도공 산소와 고양재를 관리해온 데는 역대 재경종친회장의 노고(勞苦) 못지않게 그야말로 혈성(血誠)으로 헌신한 종현들이 적지 않았다. 많은 분들이 있지만, 우선 손꼽을 수 있는 분이 오래도록 총무이사(總務理事)를 역임(歷任)하며 봉사해온 동건(東健) 종현과 홍신(弘信) 종현 두 분이다. 이분들은 실로 직접 발로 뛰며, 종사에 몸 바쳐 일한 분들이다. 고양 선산의 문중 환원(還元)을 위해 온갖 난관(難關)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분투하여 드디어는 그 결실(結實)을 보았고, 군부대(軍部隊)와의 협상에 집요한 노력을 다하여 문중(門中)에 최대한의 이익을 가져오는 등 이루 매거(枚擧)할 수 정도로 많은 기여가 있었던 두 분이다. 현 총무이사 양신(良信: 종파, 2005년 총무 피선.) 씨 역시 70 노구(老軀)에도 불구하고, 수년 간 매일 출근(出勤) 근무함은 물론, 고양재를 위시한 경향(京鄕)의 선조(先祖) 유적지를 오가면서 수많은 일을 수행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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