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수성사(壬辰守城祠) 전경 =
임진수성사(壬辰守城祠)는 임진왜란 당시 영광(靈光)에서 창의(倡義: 국란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킴)하여 군성(郡城)을 지켰던 55명 의사(義士)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제사(祭祀) 드리며, 그 충의(忠義)를 기리는 사당(祠堂)이다.
임란 당시 왜적의 침략으로 국가가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기에 처하자 전(前) 만호(萬戶) 강태(姜泰), 선양정(善養亭) 정희맹(丁希孟), 진사(進士) 수은(睡隱) 강항(姜沆) 등 영광(靈光)에 거주하던 선비들은 사매당(四梅堂) 이응종(李應鍾)을 수성대장(守城大將)으로 추대한 뒤 삽혈동맹(揷血同盟: 희생물의 피를 마시며 맹세를 다지는 일.)하여 목숨 바쳐 성(城)을 지킬 것을 결의(決議)하고, 방위(防衛)의 방략(方略)에 따른 부서(部署)를 정하여 활동하였다. 이 사당은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고, 구국(救國) 대열(隊列)에 참여한 의사(義士)들을 추모하기 위해 그 후손과 유지(有志) 인사들에 의해 건립(建立)되었다.
사매당은 양도공(襄度公) 이천우(李天祐)의 6대 종손(宗孫)으로 일찍이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 생원(生員)이 되었으나 당쟁(黨爭)의 조짐을 보고, 귀향(歸鄕)하여 학문에 전념하였고, 특히 예학(禮學)에 일가(一家)를 이뤄 『가례부주(家禮附註: 가정의례에 대해 상세한 주석을 단 책)』라는 책을 저술(著述)하기도 한 학자(學者)였다. 사매당은 임란(壬亂)이 발발하자 당시 71세의 고령(高齡)임에도 당면한 국가의 위기를 좌시(坐視)하지 않고 장성(長城) 남문창의(南門倡義)에 수창(首倡)으로 참여한 뒤, 고향인 영광으로 돌아와서는 도별장(都別將), 곧 수성대장으로서 향토(鄕土) 방위의 중책을 수행하였다. 사매당의 아우 한천당(寒泉堂) 홍종(洪鍾: 효행과 창의로 천거되어 召村道察訪에 제수됨.)과 3남 극부(克扶: 生員으로 王子師傅와 鰲樹道察訪에 제수됨), 4남 극양(克揚: 忠義衛 副司果), 조카 극수(克授: 晩翠堂 黃鍾의 2남, 충의위 부사과) 등도 이 때 사매당을 수행하여 장성(長城)과 영광(靈光)에서 창의(倡義)하여 중요한 임무를 맡았던 분들이다.
= 도별장(都別將) 사매당(四梅堂)의 위패 =
임란 당시 영광 선비들의 창의(倡義) 사실을 일컬어 오성창의(筽城倡義: 오성은 영광의 옛 이름.)라고 하는 바, 의사들의 불타는 구국(救國) 의열(義烈)은 후인(後人)들의 귀감(龜鑑)이 되었기에 오래도록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고 여러 문헌에 등재되었다. 임란이 끝난 뒤 150여 년 뒤인 영조 23년(1747)에는 당시 유최기(兪最基) 영광군수가 그 서문(序文)을 써서 널리 현창(顯彰)할 뜻을 밝힌 『수성록(守城錄)』도 편찬되었는데, 이듬해 어사(御史) 한광회(韓光會)가 내려와 당년(當年)의 유적(遺蹟)과 문헌(文獻)들을 살펴본 뒤 감명(感銘)을 받고 수성록의 간행을 독촉하여 드디어 군내(郡內) 봉정사(鳳停寺)에서 초판본(初版本)이 간행되었다. 이를 보면 창의 제현들의 후손들은 임란 이후 그 때까지 일백 오십여 년에 이르는 동안 계(契)를 조직하여 선조들의 거룩한 행적(行蹟)을 추모하고 기념하며 상호간의 돈목을 다졌던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오성창의(筽城倡義) 사실은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같은 역사 문헌, 『영광군지(靈光郡誌)』, 혹은 호남 인사들의 문집 등에 참여 인물들의 행적이 기재(記載)되는 등 간간이 조명(照明)되었으나 이에 대한 본격적인 기념사업이 이루어진 것은 8.15 광복(光復) 후의 일이었다.
1964년 영광향교에서 오성창의(筽城倡義) 수성제현추모회(守城諸賢追慕會)가 발족되어 성균관장(成均館長) 김순동(金舜東)이 찬술한 수성제현의적비(守城諸賢義蹟碑)가 영광군청 안에 건립되고 뒤이어 『제현실기(諸賢實記)』가 간행되었다. 이와 같은 사업들의 추진에는 사매당의 14대 종손으로 당시 영광향교의 전교(典校)였던 경당(敬堂) 이용연(李龍淵)의 노고(勞苦)가 지대하였다.
임진년의 의열을 계승하고자 하는 열망은 계속되어 1992년 9월 영광군내 유지(有志) 인사(人士)들과 창의제현 후손들은 오성창의기념사업회(筽城倡義記念事業會)를 조직하여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이들의 노력이 결실되어 1994년 12월 전남사학회(全南史學會)에서는 영광 임진수성에 대해 조명하여 그 편제(編制)와 방략(方略)의 치밀함에 대해 높이 평가한 바 있다.
1998년에 『영광임진수성록(靈光壬辰守城錄)』이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01호로 지정되고, 기념사업회와 영광문화원이 함께 주도하여 공공 예산에 의해 이 책의 국역본(國譯本)이 간행되었다.
2000년 12월에는 수성제현의 의열(義烈)을 기릴 사우(祠宇)의 설립 계획이 구체화되어 영광읍(靈光邑) 무령리 (武靈里) 국유지를 불하받았으며, 2001년 2월에는 본 기념사업회를 임진수성사적보존회(壬辰守城事蹟保存會)로 개칭하여 사단법인(社團法人)으로 발족시켰다. 2001년 4월 각계 내빈들의 축하 속에 임진수성사(壬辰守城祠) 기공식이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 수성사 묘정비 =
2002년 5월, 수성대장 사매당 이응종 외 54현의 신위(神位)를 모신 사우(祠宇)가 드디어 완성되어 웅자(雄姿)를 드러내었다. 이어 동년(同年) 10월에는, 사매당의 15대손으로 이 기념사업에 처음부터 참여해 기여해온 본 보존회 상임 고문 이동혁(李東奕) 씨 찬(撰) 수성사묘정비(守城祠廟庭碑)가 사당(祠堂) 경내(境內)에 건립되었다. 비문(碑文)의 찬술자는 1980년대 초, 사매당이 임란시 수창(首倡)으로 참여한 장성남문창의(長城南門倡義)의 기념사업회 후손 대표로서, 기념사업회 이사장이었던 이을호(李乙浩, 호 玄菴, 襄度公 후손, 당시 광주박물관장.) 박사와 더불어 그곳 창의 제현들의 신위(神位)가 모셔진 오산창의사를 중수(重修)하고, 남문창의에 대한 학술대회를 개최하여 그 성과와 역사적 의의를 전국에 널리 홍보한 바 있다.
= 기념관 전경 =
이듬해 2003년에는 수성사 경내에 큰 규모의 기념관이 완공되었다. 기념관에는 지금 제현(諸賢)들의 임란 당시 행적(行蹟)이 담긴 유물(遺物), 각종 문헌(文獻)과 문집(文集) 등이 전시되고 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임진수성사가 조성(造成)되기까지에는 실로 많은 세월(歲月)이 소요되었고, 이대연(李大淵) 임진수성사적보존회 이사장 등 제현 후손들의 혈성(血誠)과 끈질긴 노력(努力)이 경주(傾注)되었다. 또, 많은 예산(豫算)의 배정(配定)과 행정적 편의를 위해서 국회의원 이낙연(李洛淵)을 위시한 각급 의회(議會) 의원들과 김봉열(金奉烈) 영광군수를 위시한 행정(行政) 실무자들의 꾸준하고도 깊은 배려(配慮)가 있었다.
= 수성사 신실 내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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