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산창의사(鰲山倡義祠) =
임진왜란 초기에 장성(長城) 남문(南門)에서 창의(倡義)한 72현(賢)의 위패(位牌)를 모신 사당(祠堂)으로, 전남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에 있다.
우리 종중 선조 중에서는, 수창(首倡)으로 참여한 사매당(四梅堂: 應鍾)을 위시하여 그 아우님 한천당(寒泉堂: 洪鍾), 아드님 우헌공(愚軒公: 克扶, 곧 사부공), 죽헌공(竹軒公: 克揚), 삼종손 우봉공(牛峰公: 根, 광주 거주) 등이 창의 대열에 합류하여 왜적을 방비하였다. 이 중 우봉 공의 경우는 후일 의병(義兵)을 이끌고 경기도 일대까지 진격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1925년 양도공의 종손인 경당(敬堂) 용연(龍淵)은 이 오산창의사(鰲山倡義祠: 당시는 鰲山祠) 복건(復建)에 참여하여, 이상의 선대(先代) 5위(五位)를 이곳에 배향(配享)하였다. 서슬 푸른 일제하에서 민족정기(民族正氣) 함양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이 남문창의(南門倡義)에 대해 1982년 정치인 김녹영(金祿永: 1984년 국회부의장 역임.) 등 전국적 명망가(名望家)들이 대대적인 기념사업(記念事業)을 벌인 바 있는데, 이 때 사매당의 후손으로 오산창의사 대표였던 동혁(東奕) 종현이 기념사업회장인 을호(乙浩) 박사(양도공 20대손, 당시 광주박물관장)와 함께 학술회의를 개최하여 그 역사적 조명을 시도하는 한편, 독립기념관(獨立記念館)에 임란(壬亂) 당시의 격문(檄文)을 국역(國譯)한 어록비(語錄碑)를 건립(建立), 전시(展示)한 바 있다.(격문비 국역자: 사매당 16대손 창헌)
= 오산창의사 현판 =
= 독립기념관에 세운 남문창의 격문비(조각가 김영중 작품) =
- 격문 -

아, 이 못난 늙은이가 삼가 뜻 있는 선비들에게 고하노라. 지팡이를 의지하여 북녘하늘을 우러르니 슬프도다. 거리마다 격양가 드높은 태평성대를 이백 년이나 누렸음은 모두 성조의 덕화일지니 천만세를 지난들 어찌 국은을 잊을쏜가. 불행히도 나라의 운수가 기울어 섬나라 오랑캐들이 침노하여 강산은 초토되고 백성은 짓밟히고 있으니 참으로 통탄치 않을 수 없도다. 삼군은 눈물을 흘리며 죽음을 무릅쓰고 충절을 다하고 있거니와 천리 밖 의주의 조정에서는 우리의 궐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아. 호남 오십 주군에 어찌 의기남아가 없으리오. 지사들이여, 모두 일어나 의로운 칼을 들어 나라를 구하고 왕은에 보답할지어다.
내 비록 몸은 늙었을지언정 말에 오르니 힘이 솟고, 분한 마음에 적개심은 불타오른다. 각 고을의 선비호걸들이여, 장성현 남문 의병청에 모이시라. 우리와 우리 장정들이 구국의 기치를 높이 들고 진격하면 뒤 따르는 자 구름같이 모일 것이요, 군량은 산더미처럼 거두어지리라. 우리 모두 통분의 눈물을 뿌리며 죽음으로써 나아갈진대 반드시 대첩을 거두리라. 왜적을 섬멸하여 창해에 칼을 씻고 한양을 수복하는 공을 세워 왕은에 보답하고 청사에 길이 그 공훈을 새길진저!

선조 25년(1592) 7월 20일 임진왜란시전남 장성남문 의병청 구국 격문

위 격문비에 대한 독립기념관 홈페이지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전라남도 장성을 중심으로 한 호남 각 고을의 50여 문중 70여 의사는 장성현 남문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3차에 걸쳐 3천여 의병을 모아 출전하여 촉산, 진위, 괴산, 용인, 소사, 진주, 남원 등지에서 왜적과 싸워 많은 공을 세웠다. 한편 수천 석의 의곡(義穀)을 모아 의주 행재소와 다른 의병소에도 군량을 조달하여 왜병을 몰아내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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